산업근대화 터닦은 1세대 경영인
울산 떠나지 않은 신 정주인 모범
산업근대화 터닦은 1세대 경영인
울산 떠나지 않은 신 정주인 모범
  • 권승혁 기자
  • 승인 2010.08.11 21: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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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김영주 한국프랜지 회장 타계
고 김영주(金永柱) 한국프랜지 명예회장은 타지에서 울산에 들어와 정착한 ‘신 정주 울산인’의 모범이다.

고인은 1969년 현대중공업 터전을 닦을 때부터 울산에 머물며 산업수도 정초를 닦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울산에서 성취한 대기업 간부들이 대부분 서울이나 고향으로 떠날 때 고인은 자신이 일군 사업장인 현대중공업에서 5분거리인 남목동에 집을 짓고 머물렀다.

심완구 전 울산시장은 “울산을 무척 사랑한 울산인이었다. 시장 재임중 큰 토목공사를 할때면 많은 조언을 주기도 했다”며 “5일전 노환이 악화됐다는 연락을 받고 문안을 했는데 기어이 유명을 달리했다”고 아쉬워 했다.

고인과 지난해 까지 골프를 할 만큼 각별한 친분을 지닌 심 전 시장의 회고에 따르면 고인은 월드컵축구장을 만들 때 조경분야에 각별한 조언을 마다하지 않았다. 현재 월드컵 축구장에서 가장 우뚝한 소나무인 ‘대통령 나무’는 고인이 심 전 시장과 함께 양산 지역을 답사해 선정했다. 또 1985년 울산CC를 조성할 때 고 김기수 전 상의회장과 함께 장기영부총리를 만나 허가문제를 풀어내는 역할도 했다.

또 이수성 전 총리가 ‘김구선생 추모사업회’를 구성하면서 전국 16개 시도 대표인사를 선정할 때 울산대표를 맡기도 했다.

고인의 비서실장을 오래동안 지냈던 (주)신산 김응우 사장에 따르면 고인은 서화·골동·분재에 조예가 깊었고 많은 작품을 소장했다. 자서전을 만들라는 권유가 있었으나 고인의 삶이 정주영 명예회장과 떼낼수 없을 만큼 밀접했기 때문에 정 명예회장에 누가되지 않으려고 삼갔다.

고인은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과 방송 드라마를 통해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정 회장은 고인에 대해 “엔진소리만 들어도 어디가 고장난지를 알아차렸고,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며 ‘기계박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인은 1970년대 현대중공업의 직원이 3천여명이었을 때 사장직을 역임했다. 당시 사명이 ‘현대조선’일 때 사장으로서 직원 개개인에게는 검소한 생활과 1인1통장 갖기 운동을 강조했고, 회사운영에서는 인화단결과 능률향상으로 세계속의 조선회사로 성장할 것을 주창하기도 했다.

1974년 동구 동부동에 설립된 한국프랜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다 자녀들에게 넘겨줬다. / 권승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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