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티고
버티고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7.28 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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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티고(vertigo). 사전적 의미는 현기증이란 뜻이다. 파일럿에게 나타나는 비행착각현상을 이르는 항공전문용어기도 하다. 전투기 추락사고의 원인 중 밝혀지지 않은 대부분은 조종사의 버티고에 의한 사고로 추정된다. 2006년에는 최신예 F-15K 전투기가 훈련중 바다로 추락했는데 엔진도 계기판도 이상없었다고 한다. 버티고가 의심되는 사고였다. 2007년 7월엔 공군 KF-16 전투기가 서해상에서 추락해 조종사 2명이 숨졌는데 군수사당국은 조종사의 버티고로 결론낸 바 있다.

사람은 귓속의 반고리관과 이석기관을 통해 회전운동과 중력 가속도의 방향 및 강도를 감지한다. 그러나 조종사에게 공중급선회와 수직상승은 평형감각에 더 큰 자극을 주게 되고, 실제상황과는 전혀 다른 정보를 전달받게 된다. 지상이탈에 대한 불안감, 공기밀도와 기압 등의 차이로 거의 모든 조종사가 버티고를 경험한다고 한다.

조종사는 선회비행을 오래하면 선회감은 없고 직선 비행감만 들게 된다. 선회하다 중단하면 반대방향으로 도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참조점이 없는 야간 비행은 더하다. 바다에 떠있는 고깃배의 불빛이 하늘의 별로 보이는 착각때문에 조종사는 비행기를 거꾸로 회전하는 배면비행을 하기도 한다. 이 상태로 고도를 올리면(실제로 하강이지만) 비행기는 뒤집힌 채 바다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특혜시비로 수많은 난항을 겪었던 제2롯데월드 건립 사업이 지난달 서울시 건축심의를 통과했다. 지하6층에 지상123층, 555m 높이로 지어지는 제2롯데월드는 현재 터파기 공사가 진행중이다. 잠실에 세워질 세계 최대의 마천루 때문에 한때 찬반논쟁으로 현정부 초기부터 말들이 많았다. 반대론자들은 성남 공군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의 항로와 겹치고 그렇게 되면 조종사의 비행착각(버티고) 때문에 생길 사고위험을 들어 건립에 반대해 왔다.

제2롯데월드 건립에 대해 지난 정권에서는 반대입장을 분명히 했던 군이 현정부 들어서는 성남 공군지지의 동편 활주로를 3도 오른쪽으로 틀게 되면 건립될 건물과 항공기간의 이격거리가 1500m나 되어 안전하다며 찬성 입장으로 돌아섰다. 재작년 공청회에 나온 군 관계자는, 군이 작은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경제살리기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도 있다.

한마디로 안보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는 얘기다. 지난 시절, 한때 안보가 우리 사회의 모든 논란을 잠재우던 시절이 있었다. 안보논리는 권력을 유지해야 하는 정치세력이 반대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양치기소년의 거짓말에 면역이 생긴 마을사람들처럼 어느 순간 안보논리의 약발은 현저히 떨어지게 된다. 천안함사건으로 촉발된 여당의 안보논리는 최근 6.2지방선거에서 되레 역풍을 맞은 것이 그 한 예이다. 이제 그 자리를 경제논리가 차지했다. 변화된 트렌드를 잘도 읽어내고 이용한다. 이제 경제논리의 파괴력은 전시대 안보논리를 능가한다. 경제논리는 10년 진보정권도 바꿔놓았다. 지난 대선에서는 죽은(?) 경제를 살리겠다는 슬로건을 내건 현 정부에 유권자들은 표를 몰아주었다. 반대세력에 의해 제기된 도덕성논란에 대해 유권자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제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경제를 고집하며 버티기만 하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과연 경제가 우리 시대의 지고지순한 가치인지는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4대강 사업을 밀어부쳐도 되고, 경제만 살릴 수 있다면 사고위험에도 불구하고 555m의 바벨탑을 건립할 수 있는 것인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이 과연 진실일까. 비행착각처럼 사람은 때로는 죽음과 마주하더라도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착각은 가끔 신념과 조우한다. 끔찍한 순간이다. 착각과 만난 정치적인 신념, 종교적인 신념은 가끔 광신의 테이프를 감아놓은 장난감 오리같다. 만약 우리 사회 구성원 절반 이상이 집단 버티고에 걸린다면? 하나님과 직접 소통하겠다고 탐욕과 이기심의 벽돌로 한장한장 바벨탑을 쌓던 사람들이, 자신의 착각을 인정하지 않고 버티다가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 김명석 서울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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