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스케치
이별 스케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6.1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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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퍼런 저 강물
이제는 건너야 한다

갑자기 시간이 절름거리고
속도를 잃은 바짓가랑이 사이로
바람은 청맹과니가 되어 파닥인다

여름밤이 눈 동그랗게 뜨고 지켜보다가
백열등 흔들어 댄다.
은밀하게 자라던 나무 한 그루 깨워

벽 뒤에 묶어둔 길 풀어 던져준다
영문 모르는 채
한쪽 다리가 맥비된 나무,
자꾸만 현기증 나서?
잠자던 자리 돌아다보지만
날 밝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걸
이내 알아차린다

백열등이 꺼진다
넓어진 강물 소리
어둠 속으로 튀어 오르며
서둘러라 서둘러라 등 떠민다



김정숙

시인, 울산문협 회원, 두레문학 부회장

가자, 떠나자. 이 땅의 관념과 철학과 종교가 나의 그것들과 다르니 가자. 나의 사랑의 둘레가 너희의 그것과 크기 다르고 두께도 다르니 가자.

결별의 눈물일랑 한갓 호사(豪奢)에 불과하니 그냥 가자. 시인에게 강이란 이 땅과 저 둔덕을 가르는 엄정한 이별의 실존. 강가에 서라. 이제 떠나는 자의 발아래 시퍼렇게 출렁거리는 강물을 보며 가늠하라.

이 결별 뒤에 이어올 “세상 다름”, “가치 다름”, “사랑 다름”에 자유로이 가슴을 열 수 있는가?

이 결별 다음에 지금껏 달콤히 익숙해 왔던 이제 곧 거짓이 될 사랑과 온전히 단절할 수 있는가?

저 강물 건너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땅. 한번도 익숙해 본 적 없는 곳으로 저 쾅쾅 물살져 흐르는 시퍼런 강물을 홀로 건너려는가? 이 결별의 순간에 뉘라 담담히 걸어가나? 절름거리는 다리 사이로 시간도 강물 따라 흐르고 걸음은 느려져 갈 곳 모르니 바람만 바짓가랑이를 잡고 파닥거린다.

바람의 이름은 떠남. 늘 떠나는 바람과 늘 흐르는 강물은 동형배우(同形配偶). 언젠가 시인은 꿈인가 생시인가 강물 따라 흘러갔을 터. 그때 바람이 꺼이꺼이 따라가며 부르던 사랑 노래, 길의 노래, 바람의 노래를 기억하는가? 길 떠나는 자의 꿈은 “버림“, 길 끊어진 자리에서 다시 길을 세워 떠나는 자들의 꿈은 ”버림“

길은 늘 끊어지고 길은 늘 다시 만들어지는 것.

캄캄한 절벽 속으로 휘휘 손을 내저어 새로이 길을 끄집어 내고 그 길을 가는 자. 시인은 길을 깔아두는 자. 단절의 절망을 천만번 넘고 나면 길은 천지사방으로 널려 있어 비로소 외롭지 않고 이 황홀한 절망의 방정식. 시인은 그 비밀의 해(解)를 가슴에 품고 산다.

시인은 외로울 때 자신을 잠재울 줄 안다. 시인은 열쇠를 가지고 산다. 막힌 것의 막히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시인은 열쇠를 가지고 산다. 막힌 것은 늘 막혀 있지 않음을 아는 죄로 열쇠를 가지고 산다. 시인의 열쇠, 업보(業報)처럼 누군가의 울음에 누군가의 분노와 절망에 반드시 열쇠를 대고 울음의 반대말과 분노와 절망의 반대말을 불러오는 것이다.

오늘 시인은 나무 한그루, 열쇠처럼 들고 서 있다.

백열등 흔들리는 여름밤 강가에 나무 한그루 들고, 구원(救援)의 나무 한그루 뿌리 채 뽑아 들고 서 있다. 캄캄한 벽 앞에서 길을 내던 비밀한 열쇠의 솜씨로 섰다. 맥비(脈?)라, 베풀고 다시 베풀어도 돌아서면 다시 베풀며 살아온 세월 세월의 더께에 눌려 이제는 저 시퍼런 강물이 무서워지는 나이테를 두르고? 어쩌랴, 가자! 그래 왔던 것.

저 “세상 다름”, “가치 다름”, “사랑 다름”을 찾아 아픈 결별의 강을 건너는 시인을 태우고 가자.

불이 꺼지고 이제 마칠 때가 되었다. 그대를 위해 징이라도 울리려나. 여름밤 하늘을 울려 퍼지면서 한 사람이 떠나는 것을 축복할꺼나. 더욱 넓어진 어둠 속으로 가자고 떠미는. 아, 그 시퍼런 강물이 튀어오르며 가자고 손 내미는…



김현철 시인, 울산문인협회. 두레문학 회원. 현대중공업 상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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