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의 노래
유월의 노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6.0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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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렇게 빛바랜 신문 스크랩 하나를 펼쳐 들었다. 신문 윗부분에 1994년 7월29일 금요일이란 발행 일자가 찍혀 있다. 스크랩된 기사의 중간 부분에 ‘내·외와골 피습 사건’이란 제목이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울주군을 드나들며 빨치산을 취재했던 기사 가운데 하나다. 그해 여름 7월 초에서 8월 중순까지 약 한달 동안 12편의 ‘그 때 그 시절- 좌· 우의 싸움’을 썼지만 유독 이 기사가 가슴에 남는 이유는 한 편의 사건속에 당시의 상황을 모두 압축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48년 3월17일 아침 8시. 당시 울산군 두동면 외와리 이장(里長) 김종문 씨 집에 조카 김용원이 울산군 인민 유격대장 서장용과 함께 나타난다. 김용원은 김씨 가문에서 가장 학력이 높았고 인물도 출중했다. 울산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일본 명치대를 중퇴했다. 이날 함께 온 서장용과는 대학 동문이었다. 김 이장의 연락을 받은 내와리 이장 손용호 씨는 내와리 경비반장 임방우 씨를 두서 지서로 보냈고 김홍조 지서장은 경찰관 6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출동해 빨치산 20명과 총격전을 벌여 서장용, 김용원 등 12명을 사살했다. 사살 당시 서장용은 28세였고 일본 명치대 법학부 출신이었다. 범서가 고향으로 해방 후 위폐(僞幣)사건으로 유명한 이관술과는 동향에다 명치대 동문이다. 서장용의 시체는 사살된 뒤 약 2개월이 지나 교전 현장에서 200m쯤 떨어진 뒤편 산속에서 발견됐는데 시체가 부패해 그가 차고 있던 혁대와 지니고 있던 수첩에 새겨진 ‘명치대’란 글자를 보고 신원을 확인했다.

이날 현장에 출동했던 두서 지서장 김홍조 경위는 이미 고인이 됐다. 고인의 회고를 쫓아 94년 7월부터 빨치산 취재를 시작했다. 고 김홍조 경위는 일제강점기 일본군으로 나갔다가 광복 후 귀국해 48년에 경찰에 투신한 사람이다. 공비 토벌 중 죽을 고비를 수십 번 넘긴 사람으로 온몸에 상흔이 있었다.

김종문 이장의 신고로 괴멸되다시피 한 울산군 인민유격대를 재건하기 위해 남로당 제4지구당 사령관 남도부는 일제 때 지원병으로 복무하다 돌아 온 김정근을 서장용의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두서 지서장 김홍조 경위와 김정근은 일본군에서 함께 근무한 전우였다. 서장용 부대가 괴멸된 후 약 2개월이 지난 5월 23일 김정근 부대는 야간에 내·외와리 이장을 동시에 살해 한다. 그래서 김종문 씨와 손용호 씨의 제삿날이 같다. 집 대문 앞에서 전신에 18발의 총탄에 맞아 사망한 김 이장을 안고 부인 김원남씨는 밤새 18군데를 솜으로 막았다고 했다. 조카가 데리고 온 빨치산에 결국 삼촌이 죽은 셈이었다.

피해를 입힌 김정근 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내와리 접선 루트를 추적한 결과 남로당 제4지구당 좌익책 최영도가 용의 선상에 올랐다. 최영도는 당시 두동면 우익 인사로 4· 19의거 이후 민주당의 핵심이었던 최영근 국회의원과 먼 인척이 된다. 경찰에 자수해 전향한 최영도 씨는 경찰관으로 특채돼 남로당 제4지구당을 토벌하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최영도씨의 제보로 공비 54명이 사살되고 13명이 생포돼 울산경찰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렸다. 당시 울산 경찰서장 이었다가 나중에 공비토벌 중 전사한 김종신 총경은 이때 무공훈장을 받았다.

지난 94년 7월, 동구에 거주하고 있는 최영도 씨를 어렵게 수소문해 만났다. 기자가 찾아가자 최 씨는 부인에게 막걸리 한 주전자를 사 오라고 했다. 약 한 시간 동안 말없이 술잔만 주고받다 나왔다. 뭔가 한마디 듣고 싶어 하는 기자의 마음을 알아챘는지 이렇게 한마디 했다. “피 묻은 손으로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능교.” 김 이장의 부인 김원남 씨와 최영도 씨도 지금은 모두 고인이다. 가장 가까워야 할 친인척, 전우, 동문들이 서로 피를 흘리며 싸웠던 시절을 뒤로 하고 모두 이 세상을 떠났다.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두고 목숨을 걸었던 그들의 이상향은 과연 어디였을까. 그 물음에 답하기에 아직은 시간이 너무 이르다. 그러나 그들 모두 이 세상에 없다는 것과 잊혀져가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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