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문성과 데이비드 라인(line)
관문성과 데이비드 라인(line)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6.02 2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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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구 달천지역에 있는 노인들은 아직도 관문성 지역을 ‘가무이’라고 한다. 그래서 북구 달천동과 중산동 일원에 있는 마을을 노령 층들은 ‘가무이 마실’이라고 부른다. 울산과 경주 경계지점에 일부 복원돼 있는 이 관문성을 지역 거주민이나 관련학자들은 비교적 잘 안다. 그러나 다수 시민들에겐 낯설다. 특히 현대사에서의 이슈 부분은 역사학자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다.

관문성은 알려진 대로 통일 신라 성덕왕 21년(AD 772년)에 축조됐다. 삼국 통일(AD 676년)을 1백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울주군 두동면 치술령에서부터 북구 대안동 바닷가까지 장장 12ĸm에 이르는 장성을 쌓은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통일 신라는 선덕왕이 즉위한 AD 780년부터 멸망하는 AD935년까지가 하대(下代)에 속한 다. 삼국통일을 달성한 뒤 1백여 년간 태평성세를 누린 신라는 이 시기에 접어들면서 왕위 계승권을 놓고 귀족들이 암투를 벌인다. 동시에 국정이 문란해지면서 문약(文弱)해지기 시작한다. 반면에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는 건국(AD 698년)이후 중흥기를 맞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강국으로 성장한 발해가 신라의 북부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당시 명목상의 경계선은 지금의 청진까지 뻗어 있었지만 실질적인 통치력은 강원도 북부에서 그치고 있었다. 이런 발해의 압력에 대비해 AD 721년에 하슬루(지금의 강릉)에 성곽을 축조했고 남으로는 잦아지는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다음해에 관문성을 축조했다. 지역민들 치고 관문성에 대해 이 정도 아는 사람은 적지 않다. 그러나 이 관문성이 축조된 지 1천 2백여 년 만에 역사의 전면에 잠시 등장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많다.

1950년 9월 4일 영천 방면에서 낙동강 교두보를 사수하고 있던 국군 8사단이 북한군에게 패퇴하자 영천 전선이 무너졌다. 당시 미군은 마산, 창령, 왜관에 이르는 서부 전선을 담당했고 국군은 칠곡, 영천, 포항을 잇는 중동부 전선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북한군은 주로 화력이 약하고 전투 경험이 부족한 국군 쪽을 집중 공격했다. 특히 9월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김일성의 다그침을 받은 북괴군 15사단이 영천을 집중 공략해 국군 8사단이 영천을 포기하게 됐다. 영천 전선이 뚫리면 대구와 포항이 뒤에서부터 포위 공격을 당해 왜관 지역을 사수하던 미 8군이 위협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된다. 자칫하면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지도상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미 8군 사령관 워크 중장은 무기력하게 무너진 한국군을 질책하며 서둘러 제2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 방어선마저 무너지면 본토로 철수할 계획을 세웠다. 이 방어선이 바로 울산 북쪽 관문성 일원에서부터 경상남북도의 도계를 따라 함안까지 잇는 약 90ĸm 의 ‘데이비드 선’이다. 이 방어선은 당시 미 8군 공병참모 데이비드 슨 준장의 지휘아래 구축됐다고 해서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한국전쟁 개전이래 최대의 위기에 몰린 미군은 당시 부산항과 수영비행장을 미군 최후의 철수 지점으로 택하고 있었다.

이 절제절명의 순간에 부산 방어를 위한 최후의 저지선으로 울산 북부가 등장한 것이다. 물론 이 방어선은 유엔군의 인천 상륙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하지만 벽안의 파란 눈을 가진 이방인에게도 관문성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어가는 전선이 방어 요충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데이비드 준장이 1개 소대 병력을 대동하고 관문성이 있는 지점에서 서쪽으로 직접 지형 정찰을 한 뒤 내린 결론이라고 하니 울산은 시대를 초월한 방어진지였던 것이 틀림없다.

울산이 통일신라 시절엔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요충이었고 현대사에 들어 와서는 공산집단으로부터 국가를 지키는 주요 방어지점이었다는 사실을 우연의 일치라고만 보긴 어려울 것이다. 운명처럼 타고난 지정학적 방어 요새였다고 봐야 한다.

/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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