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족류
두족류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5.27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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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은 편 의자에 앉은 여자의 흰 손이 남자의 허벅지에 붙어 있다

낙지발 같다

전동차 안이 푸르러지고, 풀어헤친 머리칼이

물풀마냥 물결치고

진흙구멍을 막 빠져나온 긴 낙지발이, 여자의 가는 손가락이,

개흙바닥 위를 긴다

폐선처럼

개펄에 빠진 어구처럼

낡아서 삐걱대는 저 남자, 반쯤 잠 들었다

덜컹, 전동차가 흔들리고

남자의 아랫도리에서 덜컹, 낡은 부속품들이 흔들리고

창밖에는 저녁놀이 흐르는데

가압류 딱지가 붙은 섣달 그믐이 붉디붉은 인줏빛이다

고철처럼 남자의 가랑이 사이가 산화하고

여자의 손가락이 흠뻑 녹물에 젖는다

간 여름의, 등이 뜨거워진 왕새우떼들 손등에서 튀어 오르고

남자의 전신에다 흡반을 댄 저 여자

너풀대는 물풀 속에 웅크린 한 마리 두족류다

<시작 노트>

섣달그믐의 퇴근길, 전동차 안은 쓸쓸했다.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는 이들은 서둘러 귀성길에 올랐고, 도시의 변두리에서 갈 곳이 없는,

갈 곳이 있어도 갈 수 없는 사람들의 풍경은 눈에 뛸 만큼 수척했다. 건너편에 앉은 남녀의 행색이 또한 그렇게 수상스럽다.

마흔 중반쯤의 여자는 싸구려 인조 모피에 짙은 화장, 그리고 붉게 칠한 긴 손톱이

그녀가 이때껏 이 도시에서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하며 도회의 변두리 삶을 배회하고 있다는 암시로 충분했다.

옆에 앉은 초로의 남자 또한 지칠 대로 지친, 고향 성묘길 찾을 여비 한 푼 없어 보이는 빈털터리 행색이다.

그러나 여자는 그런 것에도 아랑곳없이 이 시간 행복하다.

찌들린 어둠에서 건져 나온 자신과 동행해 주는 사람이 있다.

비록 녹슨 어구 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끈적한 흡반을 댈 실존이 있는 것이다.

그 실존 앞에서 여자는 그저 한 마리 두족류가 되어도 좋다.

귀성길에 못 올라도, 가족이 다 모인 두레상 언저리에 다가앉지 못해도,

개펄에 빠져 지난 여름 뜨겁게 튀던 왕새우떼들을 떠올리며 웃는다.

그립다! 는 말은 상당히 사치스런 감정이다. 이 사치를 부리며 여자는 이 변두리 인생에 행복해 한다.

내 앞에 한사람이 있어 마주 서 주는 것만으로, 빤히 얼굴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이 시간 즐겁다.

그게 다다. 절대고독과 절망의 밑바닥을 디뎌 본 사람은 안다, 다 안다.

며칠 있으면 추석명절이 다가온다.

전동차 어느 한산한 칸에서, 그 해 섣달그믐의 남자와 여자를 우리는 또 부딪히리라.

유현숙은

경남 거창 출생

2003년 『문학 선』으로 등단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기금 수혜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

/ 유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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