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진의 변(辯)
퇴진의 변(辯)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0.05.17 21:4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맹호는 굶주려도 풀은 먹지 않는다는 여러분과의 약속은 지켰습니다.”

국회의원에 두 번이나 당선되기도 했던 지역정계의 원로 이규정 전 의원이 담담한 어조로 회견문을 읽어 내려갔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던 노호(老虎)의 얼굴에는 잠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대통령 보고 ‘자네’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더 많이 따올 수 있는 시장후보라고 힘주어 말하던 그였다. 후보자등록 마감 시각을 불과 2시간 앞둔 5월 14일 오후 3시 울산시의회 프레스센터. 그 당당함은 서서히 ‘체념’의 터널 속으로 빨려들고 있었다.

선거일을 돕던 몇 안 되는 참모들에게 ‘기름 값’이라도 넉넉히 줄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고갯짓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가타부타 않고 선거일을 수발해 온 그의 오랜 참모들도 미소로써 동의를 표했다. 칠순을 바라보는 그에게 ‘중도 하마’의 결단을 내리게 한 첫째 이유는 힘에 부치는 자금사정, 둘째 이유는 1부 능선도 넘보기 힘든 당선가능성이었다.

“수억 된다는 법정 선거자금의 십분의 일도 장만하기 어려웠습니다. 지는 선거를 꼭 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풀은 먹지 않는다’는 맹호의 기개를 애써 잃지 않으려는 표정이 뚜렷했다. 가시 돋친 그의 자긍심은 하루 전날 어느 TV가 마련한 후보자 토론에서 유력 시장후보와 벌였던 서슬 퍼런 입씨름을 재구성해 내고 있었다. 역대 어느 시장보다도 ‘우민화’ 전술을 잘 구사하면서 시민들의 눈과 귀를 막는 잘못을 저질러 왔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건전한 언론의 비판이 진정한 시정의 발전을 가져온다’는 고언도 서슴지 않았다.

정치후배들에게 던지는 조언은 더욱 단호했고, 그 의미는 매우 심장했다.

“정치인은 일반국민들보다 조금은 더 높은 도덕성과 애국심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왜 정치를 하나, 왜 정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나, 이런 역사의식과 시대정신의 바탕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의 회견은 사실상 정계 은퇴 선언이었다.

“친애하는 울산시민 여러분! 그동안의 성원과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저는 오늘 정계를 은퇴합니다. 재산도 청춘도 다 바친 파란만장의 이규정 정치인생이 가치 있는 희생이었는지, 후세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겠습니다.” “못 가진 자, 덜 가진 자의 슬픔과 아픔을 같이하는 그런 서민시장이 되고자 했습니다. 굶는 이웃은 없는가, 아픈 이웃은 없는가, 전기가 끊기고 가스공급이 중단되고 수도가 끊긴 이웃은 없는가, 국수로 점심을 때우는 경로당에 겨울준비는 되어가고 있는가를 걱정하는 시장이 되고자 했습니다.…장기 집권에서 오는 폐단에서 울산을 구하고자 했던 꿈을 여기서 접습니다. 때로는 야단도 치는 당당한 지역 원로정치인으로 항상 여러분 곁에 있을 것입니다.”

모두 그런 건 아니지만 ‘퇴진의 변’에는 대체로 잔잔한 감동과 함께 당사자의 진한 고뇌가 담기기 마련이다. 이규정 원로정치인뿐만 아니라 이번 지방선거 과정에서는 그런 사례를 간간이 접할 수 있었다. 경선 과정에서 북구청장 도전의 꿈을 어쩔 수 없이 접어야 했던 무소속 이상범 전 북구청장이 그랬고, 생활정치 실현을 내세웠던 진보신당 김광식 구청장 예비후보도 그랬다.

특히, 시민운동가에서 정치신인으로 변신한 김창선 전 울산시민연대 사무처장의 실험정치 실패의 고백은 가슴 때리는 데가 있다. 정계 입문 한 달 반 남짓 구두 밑창이 다 닳도록 선거구 곳곳을 누볐던 그는 후보자등록 마감 다음날 한 통의 서한을 보내왔다. 후보등록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심경을 담았다.

“언제 후보단일화를 하느냐는 질문과 단일화를 이루면 지지하겠다는 의견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후보단일화의 방식이 정치신인과 신생정당은 불리해지는 상황으로 전개됐습니다. 이런 구도는 지역에 필요한 정책이나 후보자들의 능력을 검증하는 기회를 마련하지 못하는 문제점도 발생시켰습니다.” “시민운동의 경험을 토대로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는 생활정치를 실현하겠다고 출마한 신생정당의 정치신인 시의원 후보로서 저를 알리는 데 재정과 조직, 홍보에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역 언론에서도 ‘기대주’로서 지켜보았던 그의 서한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고마움을 잊지 않고 시민들과 함께 비전과 희망을 만들어 가는 한층 성숙한 진보정치인의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 김정주 편집위원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