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은 흐른다
태화강은 흐른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3.0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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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칩이 지난 태화강변은 봄빛이 완연하다. 강둑 위에서 내려다 본 산책로에는 어제를 안고 내일을 사는 서민들이 열심히 걸어가고 있다.

얇게 깔린 강물결 위에 갈매기가 뜨는 것을 보니 물속에 갯내음이 배어 있음이리라.

당장의 삶에 연연하는 인간들 보다 바다내음을 아는 갈매기가 태화강의 심연을 더 잘 안다.

태화강의 ‘태화’란 이름의 유래는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선덕여왕 12년 자장법사가 창건한 사찰이 ‘태화사’였음에서 비롯됐다.

자장이 중국에 유학했을 때 ‘태화지’라는 연못을 지나 가다가 한 신선을 만났는데 그가 “국가를 위해 경주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고 경주 남쪽에 절을 지어주면 덕을 갚겠다”고 했다.

뒤에 귀국한 자장이 부처의 사리를 태화 탑에 봉안하고 절을 세운 뒤 ‘태화사’라 명명했다.

자비의 실천도량으로 시작된 태화사는 흐르는 강물에 이름만 남긴 채 역사의 질곡에 묻혀 사라졌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왜구의 노략질과 방화로 폐사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고려 말 우왕2년(1376) 기록에 보면 11월 한 달 동안에만 왜구가 무려 2차례나 울산지역을 약탈, 노략질, 방화 한 사실이 나온다. 그 난리 속에서 힘없는 백성들이 겪어야 했던 고초는 상상하고 남는다.

그 때 태화사도 없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태화강이 왜와 관련해 고난을 겪은 흔적은 임진란으로 까지 이어진다.

1597년 조선을 재차 침략한 왜는 내륙지방으로 진출하지 못한 채 남해안 일대에 성곽을 쌓고 장기전에 대비한다.

이때 쌓은 것이 현재 학성동 소재 학성임은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요즘은 토사가 쌓여 강 수심이 얕지만 당시만 해도 성곽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차 있을 정도로 깊었다. 함선을 성곽 뒤편에 대기해 놓고 항시 퇴각할 준비를 했다고 한다.

태화강에 처음 제방을 쌓기 시작한 것은 일제 강점기였던 1928년이다.

명분은 홍수를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동양척식 회사가 공유수면 매립으로 생기는 간척지를 얻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제방이 그 때까지 태화강으로 유입되던 소하천을 막아버려 강북에 있는 성남동, 학성동, 반구동 지역으로 하여금 물난리를 겪게 하는 단초를 제공했다.

지난 1991년 8월 글래디스 태풍 때 성남동 일대가 물바다가 된 것 도 역사가 남긴 태화강 발자취의 한 부분일지도 모른다.

봉건시대 제왕의 통치 덕목 중 하나가 ‘치수’ 즉 ‘물을 잘 다스리는 것’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수자원을 잘 관리하는 것은 국가의 중요한 의무 중 하나다.

요즘 울산은 웬만큼 폭우가 쏟아져도 시가지가 물에 잠기는 소동은 별로 없다.

그만큼 살게 된 국력과 지자체의 행정능력을 실감케 하는 부분이다.

국가가 빈한했을 때 역사의 격랑 속에서 허덕이던 태화강은 올 봄 우리 곁에서 평화롭게 울산만으로 흘러가고 있다. 그 태화강에서 얼마 전 연어를 방류했다는 소식은 이곳이 마음의 고향임을 절감케 한다.

며칠 전 대학 졸업반인 딸아이가 “울산 와서 살고 싶다”고 했다.

이 곳에 와서 가끔 태화강변을 산책하며 사는 삶도 괜찮을 성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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