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절규
장미의 절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5.1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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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화려하진 않았어요

갈색 톤의 피부에 떨어진 옷을 입고

무거운 흙덩이를 상전처럼 모시며

오물이나 주워 먹던 몸종이었죠

어느 따스한 날 오후

백마 탄 봄비에 키스를 받고

한순간 아름다운 공주로 변한 나

원초적인 본능으로 꽃잎을 열었어요

뿌리가 꽃이란 걸 기억하세요

폭발적인 인기를 땅속에 묻고

아무도 몰래 물구나무를 설래요

눈부시게 햇살 좋은 날

사랑을 머리로 배운 사람들이

화려한 구두에 현혹되어

칼날 선 전지가위를 발목에 들이대도

보석 같은 미소와 붉은 심장을

손톱자국 하나 없이 지키며 살래요

<창작 노트>

사십 대 중반기를 넘어서면서부터 인생의 묘미를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연세가 더 지긋하신 분께 이런 말씀을 드리면 코웃음을 치시면서 아직 멀었다고 핀잔을 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개인적인 삶을 반추해 보면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펼쳐 보니 자기중심적 사고에 갇혀 있는 유아가 마음대로 스케치한 상화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엔 폐물 상자를 열어 오래전부터 간직했던 귀걸이와 반지 그리고

고리 빠진 목걸이 들을 몽땅 팔아버렸습니다.

엑스 사리를 좋아하던 저는 보석 가게의 통유리 안에서 반짝이는 18K 장신구들에 목숨을 걸었었죠.

젊은 시절엔 돼지고기 한 근을 사기보다는 알 굵은 큐빅 한 알을 사는 것이 더 행복했고 쌀 몇 가마니보다는 누런빛을 내는 황금의 팔찌가 더 사랑스럽던 삼십대가 되었습니다.

이젠 아이 둘 낳고 나서 뚱뚱해진 허리를 일 인치라도 더 줄여 보려고 에어로빅을 하다가 빠른 효과를 보기 위해 고가의 다이어트 프로그램에 위장을 담보 잡힌 적도 있었답니다.

웨이버 멋지게 파마가 잘 된 날이면 안개꽃과 장미를 유리병에 꽂아둔 카페에 앉아 최신 유행을 선보이는 패션 잡지와 아파트 거실을 베란다로 확장해서 민속촌으로 만들어 미니 물레방아를 돌아가게 하는 인테리어 책자를 뒤적이며 향 좋은 헤어즐 커피를 마시기도 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예상치 않게 닥쳐온 아이엠에프에 그 화려했던 시간을 버려야 했습니다.

은행직원의 독촉 전화가 참깨 볶듯 머리를 긁고 밀린 전기료에 뜯겨 가는 계량기가 눈에 실핏줄을 서게 한 것은 저의 잘난 자만심이었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야 했습니다.

그저 끼니나 때우면서 속살 잘 가릴 만큼의 옷이나 입고 살았었다면 아무도 보증을 서라고 하지도 않았을 테고 대출 창구 앞에서 인감 도장을 찍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마이너스 통장이 무서운 줄을 알게 되기까지 얼마나 모질게 살아야 했으면

활짝 핀 장미꽃이 되더라도 화려한 빛깔과 달콤한 향을 땅속에 숨겨두고 싶어질까요.

땅은 진실을 저금하는 은행입니다.

경매처리 된 십여 년의 사치와 불꽃같은 사랑에 대한 미련을 싹둑 자르고 이제 막 피어나는 새 삶의 꽃봉오리를 때깔 좋은 흙에 감추어 두고 저만의 비밀 번호를 갖고 싶습니다.

강미숙 프로필

1963년 거창 출생. 계명대학교 사회교육원 아동학과 졸업. 솔로몬영재 어린이집 원장.

『문학공간』 등단.

/ 강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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