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빔밥 철학
비빔밥 철학
  • 박문태 논설실장
  • 승인 2010.04.08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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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빔밥은 옛날 방식으로 따지면 양반음식이 아니라 서민들의 음식이다. 조금 지나친 분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음식의 맛은 한 가지 재료에 여러 양념을 버무려 만들어 놓았을 때 그 맛을 즐길 수 있다. 우리의 양념가지 수는 세계가 인정할 만큼 많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의 극히 일부만 소금을 빼놓고는 거의 양념을 쓰지 않는다.

양반들은 고급스럽고 진귀한 음식들은 따로 따로 만들어 즐겼다. 서민들은 대충대충 섞어먹었다. 전주비빔밥에는 장조림 쇠고기가 들어간다. 물론 청포묵이 들어가야 전주비빔밥이라고 한다. 장조림과 청포묵은 서로가 독특한 맛이 있는데 이 두 가지만을 섞어먹으면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엉뚱한 맛이 느껴진다. 즉 이것저것 섞어서 혼합 시켜 놓으면 개개의 독특한 맛은 잃어버리게 된다.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도 있으나 이것은 억지에 가깝다.

어쩌다보니 현재의 전주비빔밥이 유명해졌지만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는 지방마다 다르다. 또한 옛날의 비비는 방식은 없어지고 음식점에서 내놓는 방식이 널리 통용되고 있다. 여기서 두 가지만을 비교한다. 뜨거운 밥을 먼저 놓고 그 위에 재료를 올려놓는 방식이 있고, 반대로 재료를 먼저 깔아놓고 그 위에 뜨거운 밥을 나중에 놓는 방식이 있다. 이때 고추장과 참기름을 섞는 순서가 약간 씩 다를 수가 있다. 전자의 방식에서는 먹으려는 사람이 재료를 선택하여 비빌 수 있다. 쇤 고사리를 골라내어 먹지 않는다든지 들깻잎을 더 넣는다든지, 아니면 묵은 김치조각을 넣는다든지 하는 것이다. 후자의 방식에는 골라내기 어렵다. 이미 고추장과 참기름이 섞여있어서 맛을 내기가 어렵다.

양반이 식사를 끝내고 물린 상을 부엌으로 들고 와서 머슴, 식모, 하인 등이 우르르 밥상 둘레에 모여, 먹고 싶은 음식들을 바삐 자기 바가지에 집어넣고 비비는 방식이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방식이다. 고장에 따라 또는 상황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생길 수 있다. 안동의 헛제사밥을 비벼 본 사람은 알 수 있다.

이렇게 비벼놓은 밥에서 실제 입안에서 각 재료의 맛을 보기가 어려워진다. 우리 혀의 맛보는 부위가 조금씩 차이가 나기 때문에 비빔밥의 맛을 재료별로 보기는 어렵다. 특히 씹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 맛이 달라지지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래도 신경 쓰며 찾아보면 느낄 수 있는 재료들이 있다. 특히 참기름이 그렇고 육회가 그렇다. 고추장이 입안에 가득 차 버리니까 식사를 마칠 때쯤에는 무감각해지고 만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작 맛을 느껴야 할 ‘쌀밥’의 맛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다.

비빔밥 철학의 본론은 선거로 뽑는 여러 수준의 의원들에 있다. 국회의원부터 구의원까지 그 조직 속에서 한 데 모아놓으면 비빔밥이 되고 만다. 우선 어떤 재료를 넣어 비빌 것이냐가 유권자들의 선택이다. 4.19 직후에 뽑은 국회들은 노무현 탄핵 정국 뒤에 뽑은 국회의원들처럼 제대로 선택되지 않고 한 가지 재료에 편중되었다. 다른 재료(자유당)가 상했다고 외면해버린 것이다. 가끔 간장 역할을 하는 각 단위수준의 의원들이 있어도 처음 맛을 낼 때 그 존재 이유가 있지 조금만 지나면 간장의 맛이 사라지고 말듯이 그의 존재가 없어진다. 물론 이런 맛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성질은 재료 자체에 있지만 그 맛을 확인해주는 기능은 언론의 역할에 있다. ‘이런 맛도 있으니 이 맛을 느껴보시오. 이 재료는 맛이 갔으니 아예 비빌 때 빼는 것이 좋겠소. 프로파일링을 해보니 이 재료의 성격은 시간이 지나야 나타나게 되었소.’ 이런 일들을 자유롭게 해줄 수 있으면 최적의 민주주의 국가이다. 아울러 최적의 언론 수준을 전제로 한 것이다. 선거법이 있고, 그 전에 명예훼손죄가 언제나 있어서 비빔밥 재료의 프로파일링을 할 수 없으니 유권자가 제대로 비벼서 식사를 해야 한다. 재료를 잘 못 섞어도 유권자의 책임이고, 잘 비비는 것도 유권자의 책임이고, 맛을 안 보는 것도 유권자의 책임이다. 잘 뽑아서 잘 비비고 잘 부려먹어야 한다. 쌀밥 맛을 살리며.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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