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풀이
화풀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3.23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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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火)나는 감정의 상태를 점잖게 표현하면 ‘분노(憤怒)가 일어난다, 분노가 솟아올라온다’고 한다. 화를 한자 불 화(火)에 연상 작용하여 울산 말로는 ‘열(熱) 친다.’로 표현하기도 한다. 불과 열의 의미연결 관계이다.

심리학의 정신의학분야에서 우리말의 ‘화병’이 전문용어로 공식 채택되어 사전(辭典)에 올려져있다. 화병을 다스리는,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의 으뜸은 ‘풀어버리는 것이다’ 우울증을 다스리는 데에는 약이 있으나 화병을 다스리는 약은 없다. 우리말의 ‘풀어버리는 것’을 굳이 영어를 빌어다 표현하면 catharsis 로서 어떤 것을 배설하는 것이다. 화를 풀어버리지 않으면, 배설하지 않으면 응어리지어 다른 병으로 발전(?), 변화한다. 이 응어리가 심장병, 비만, 당뇨, 피부질환, 위, 십이지장궤양, 우울증, 암 등으로 연결된다. 그래서 가벼운 화풀이는 건강에 좋다고 하는 것이다.

실제 연구에서 적절하게 화풀이를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심장병에 걸릴 확률이 50% 정도 낮았다. 어떻게 화풀이를 할 것인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화풀이 하는 것은 가장 바람직스럽지 못하다.

학교에서 억울하게 청소 당번(지금은 이런 벌도 없어졌지만)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길가의 돌멩이를 발로 차버리는 것이 어린 학생의 가벼운 화풀이가 된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으면 집에 들어가 강아지를 발로 차버린다. 강아지의 깽깽 거리는 소리가 약간의 화를 가라앉게 한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로부터 억울한 잔소리를 듣고 면전에 바로 대들지는 못하고 부뚜막에서 며느리 눈치를 살피는, 아무 죄 없는 강아지를 부지깽이로 때린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리면 동네 우물가로 가서 함지박에 물을 받아 바가지를 띠워놓고 숟가락으로 바가지를 두드리며 너스레를 푼다. 이렇게 몸으로 화를 풀 수도 있으나 정신적으로 풀 수도 있다. 전문적 명상법은 다음 기회에 풀어본다.

소설가 박완서는 6.25 전쟁 통에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을 때 그걸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은 언젠가는 저자들을 악인으로 등장시켜 마음껏 징벌하는 소설을 쓰리라는 복수심이었다.……그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 시기를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라고 ‘석양을 등에 지고 그림자를 밟다(현대문학. 2010)’에서 술회하고 있다. 이런 마음이 훗날 그의 소설 ‘엄마의 말뚝’에 전쟁을 반대하는 주제로 잘 나타나고 있다.

하여간 화풀이를 정신적으로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학생들이 일기장에 얄미운 친구를 실컷 욕하거나, 저주를 내려달라고 끄적거리며 화를 푸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애틋하게는 바닷가의 모래 위에 짝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써내려가는 것도 응어리지려는 한을 푸는 방법이 된다.

직장에서 동료와의 비형식적 인간관계(지역감정, 버릇없는 행동, 허세부리는 생활태도, 가치관, 삶의 목표 등에서 생기는 업무 외의 갈등)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차 올라와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한국의 전통적인 화를 가라앉히는 방식이 있다. 동양의 음양적인 사유에 의한 것으로서 화(火)는 물로 꺼야지 술(알코올)로 꺼서는 안 된다는 이치를 살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냉수 한 잔을 마시는 것이다. 술을 먹어 화를 푼다는 것은 화를 더 악화시키는, 휘발유를 뿌리는 격이 된다. 놀래거나 겁에 질린 사람을 달랠 때, 냉수 한 잔을 마시게 하여 흔들리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스님들의 수행생활 속에 마음에 파도가 일어나면 차를 마시며 가라앉힌다. 아니면 가벼운 산책으로 풀어버린다. 여기서 우리가 시사 받을 수 있는 것은 화나는 장면에서 빨리 벗어나는 것이다. 스님이 법당을 벗어나 약수터에 오르는 것과 같다. 그리고 거기에서 약수 한 바가지를 들이키는 것이다. 법정 스님이 그리 하였다.

한 때 철없는 대학생들이 총장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며 입에 못 담을 욕을 함부로 해댈 때, 화가 치밀어 오른 총장에게 뜨거운 커피를 권한 사람이 있었다. 입천장을 댈 뻔 한 총장에게 냉수 한 대접을 권하여 화를 가라앉혔다. 춘투(春鬪)에 참고하기 바란다.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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