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진 의사의 고향
박상진 의사의 고향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2.28 2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때문에 김해 봉하 마을이 유명해졌고 이명박 대통령으로 인해 경북 영덕 덕실마을이 세간에 알려졌다.

이 두 마을은 향후 수십 년간 사람들의 입에서 거론될 것이고 그 곳 출향인 들은 자랑스레 고향 이름을 밝힐게다.

거물급 재계인사, 정치인이 배출되면 그 지역 향우회는 앞 다퉈 참석하는 ‘같은 고향’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는 것이 주변의 모습이다.

이런 사람들이 훌륭한 동향인들의 각고나 인생역정에 별 무관심 하다는 것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내부에서 편가르기를 한다든지 같은 조상을 두고 혈연의 정통성 시비를 벌인다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울산이 낳은 독립 운동가 박상진 의사 고향이 경주라고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는 모양이다.

박 의사는 분명히 1884년 울산 송정에서 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혹 경주사람이란 주장이 나오는 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박 의사 처가가 유명한 경주 만석꾼 최 부자 댁이다. 최씨 댁 마지막 부자 최준과는 처남매부지간이다. 최준의 작은 삼촌인 최현교가 박 의사의 장인이된다.

박상진 의사는 1918년 2월 1일 일본 경찰에 체포돼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에 대구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순국 후 기차로 시신이 경주에 도착한 것이 8월 13일이었고 8월 21일 새벽 3시에 발인했다고 한다. 도착한 날 로부터 8일이 지나서 장례를 치르게 된 배경이 박 의사의 고향에 의의를 제기하는 단초가 된 것 같다.

발인을 새벽 3시에 했다는 것, 시신도착후 8일 지나서 장례를 치렀다는 것 등 자체가 상가의 분위기를 짐작케 하고 남는다. 일제 관헌의 감시 하에 조문객 조차 내왕이 불편했을 것이고 장지마저 쉽게 내놓을 사람이 없었을 터이다.

8월 더위에 시신을 안치하지 못해 애태우자 처가댁에서 나설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울산 박씨 문중은 이미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힘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보다 못한 장인 최현교가 자신이 묻힐 요량으로 잡아뒀던 묘터를 내놓았다고 증손인 박중훈씨가 밝히고 있다.

그래서 박 의사가 안장된 곳이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다.

당시는 요즘처럼 통신시설이 발달되지 못했던 탓으로 입으로 전파되는 소문이 ‘정통한 소식’으로 둔갑되던 시절이었다.

경주 최고의 부잣집에서 묘터까지 내놓으면서 장례를 치렀으니 귀로 전해 듣는 사람들이야 박상진 의사를 ‘경주인’으로 오해 했음직도 하다.

문제는 후손들의 인식이다.

독립지사들이 얼마나 혹독한 고초를 당했는지 알아보려고 애쓰지는 않고 동향임을 강조하기에 골몰한다.

상해 홍구 공원에 폭탄을 던져 행사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윤봉길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압송돼 사형이 집행된다. 집행 당일 형장으로 끌려 나오는 윤의사는 걸음을 제대로 못 걸었다는 기록이 있다. 모진 고문으로 인해 죽음 일보 직전에 이른 채 총살형이 집행됐는 얘기다.

내일이 3.1절이다.

집집마다 태극기 꽂고 박상진 의사 동상 앞에 묵념하는 행사로는 박 의사의 고향을 찾을 수 없다.

악형에 시달려 무릎 정강이뼈가 허옇게 드러나 보이고 모진 고문으로 몸을 제대로 못 가누면서 형장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이제 와서 그의 고향이 ‘울산이냐, 경주냐’를 따지는 후손들은 부끄러워 해야 한다.

박상진 의사의 고향은 조국광복을 위해 기꺼이 몸을 눕힌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기슭이다.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