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조국에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
  • 김영수 기자
  • 승인 2008.02.28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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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술, 조선징용 노동자 잔악상 고발
이관술,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전설적’

울산지역에는 대한 광복회 총사령을 지낸 박상진의사라는 대표적 항일 독립운동가가 있다. 그러나 자료가 수집과 홍보가 미흡할 뿐만 아니라 광복직후 좌익활동 혹은 월북으로 알려지지 않은 울산 출신 항일 독립운동가들도 존재한다.

제89주년 3.1절을 맞아 지역에 알려지지 않은 항일유공자들의 발자취를 ‘울산 남구 문화 5집 울산의 인물 탐방 장재술선생’과 ‘이관술 1902~1950 조국에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를 통해 따라가 본다.

△ 장재술

장재술 선생은 1916년 5월 1일 울산시 연암동에서 출생했다. 본적은 경상남도 울산 대현 용연동 87번지로 돼있다.

선생은 일본으로 건너가 박열, 서상한등과 자주 독립 및 항일 투쟁을 하다 1942년 9월 학도병 징집거부운동으로 인해 강제로 사할린(화태)으로 이주했다.

그해 11월 조선징용노동자 대우에 관한 논문을 화태신문(樺太新聞)에 익명으로 기고한 이유로 1943년 9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체포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선생은 사할린에 있는 사상범 집결 형무소에서 복역중 1945년 11월 광복으로 석방됐으나 일본 본국으로 강제 송환 됐다

1958년부터 1985년까지 사할린 억류 귀환 한국인회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면서 1966년 1월 사할린에 있는 징용 한국인의 참상을 폭로한 저서 ‘옥문도(獄門島)- 화태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을 발간했고 1973년 일제의 잔악상을 고발하는 ‘일본 지조선(일본제국 한국 병합과 침략사진 화보)’를 발간해 국내외에서 주목받았다.

지난1967년 잠시 귀국해 사할린 교포 귀환을 위한 탄원서를 요로에 전달함으로써 정부의 사할린 동포 귀환 노력의 촉진제가 됐다.

그러나 선생은 뜻을 다 이루지 못한 회한과 지병의 고통에 시달리다가 지난 1985년 6월 향년 70세의 일기로 일본 가와사키 시에서 작고했다. 선생은 항일 자주 독립운동의 공로로 지난 1977년에 대통령 포장을 1990년에 대한 민국건국훈장 애족장을 서훈 받았다.

△ 이관술

일제시대 말기와 해방직후 조선에서 이관술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전설적인 사회주의 항일운동가인 이재유와 함께 투쟁했으며, 일제 패망직전까지 극심해지던 탄압과 전향공세에 국내 항일 세력이 씨가 마른 상황에서 끝까지 저항한 몇 안 되는 항일운동가의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1902년 울릉도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자란 이관술은 늦은 나이인 스물둘에 서울의 중동고교에 입학했다. 어려서부터 신동으로 유명했던 선생은 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당시 동경제대보다 들어가기 힘들었다는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대학을 마치고 귀국해 동덕여고에서 역사와 지리 선생으로 교편을 잡았으며, 이때 제자들이 박진홍, 이효정, 이순금 등으로 후에 경성 트로이카에서 같이 활동한다 교사생활을 하면서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하던 와중 1933년 반제동맹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일제하 국내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신화적 인물인 이재유와 함께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었다. 이재유가 1936년 체포된 후에는 1939년 김삼룡, 이순금, 이현상, 김태준, 정태식, 박헌영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해 투쟁했고 최후까지 일제에 저항했다.

해방 후에는 1946년 ‘조선정판사 위폐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됐고, 체포돼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대전교도소에서 복역하던 중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처형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김영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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