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과의 동침
적과의 동침
  • 김정주 기자
  • 승인 2010.02.24 21: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름난 여우 줄리아 로버츠가 열연한 1991년산 헐리우드 공포영화의 이름이지만 우리 사회에서 귀에 익은 사자성어처럼 행세하던 유행어에 ‘적과의 동침(Sleeping With The Enemy)’이란 게 있다.

사전상의 의미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이면서도(혹은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해 부득이 협력을 하는 상태’라고 한다. 이 말과 유사한 뜻을 지닌 화두를 지방선거를 석 달 남짓 앞둔 현실정치판에서 찾는다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다”란 표현을 꼽는 논객들이 있다.

이 말은 최근 울산에서 있었던 어느 단체장 출마 기자회견 자리에서도 나왔다. 소속 정당의 대변인 못지않은 어조로 회견 문장을 읽어 나가던 50대의 단체장 도전자는 질문을 받는 순간 잠시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공천 탈락에 반발해 한때 당을 떠난 사실이 있었는지를 묻는 질문에 대해 그는 묘한 웃음으로 말을 받았다. “정치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 비슷한 말은 중앙정치판에서 먼저 튀어나왔다. 세종시 문제를 둘러싸고 집권여당 내 ‘친이계’와 ‘친박계’의 양보 없는 대립이 시작됐을 즈음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이 우회 어법으로 작심한 듯 토로한 말은 “(정치엔) 영원한 적군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선배들의 말도 있더라”였다.

이를 두고 어느 중앙지 정치부기자는 다음날 해설기사의 앞머리를 이렇게 장식했다. “친박계 좌장으로 통하던 김무성 의원이 19일 사실상 박근혜 전 대표와 심정적 결별의 뜻을 표시했다.” ‘적과의 동침’이 현재진행형으로 나타난 경우였다.

찬찬히 살펴보면, 영원한 적도 영원한 동지도 없는 것이 우리네 정치 현실이다. 지난 총선에서 이념갈등으로 서로 등을 돌린 후 지금껏 앙금을 풀지 못하고 있는 진보진영의 대표적 두 정당의 사례가 좋은 본보기일 수 있다.

당의 이름표를 달고 의회에 입성했던 어느 모범 의원이 ‘6월의 지방선거를 앞두고 이름표를 바꿔달지도 모른다’는 지상보도가 지난해 말쯤 나가자 이름표 관리당국은 원색적인 비난논평으로 즉각 대응했다. 한솥밥을 먹으며 우정을 다져 왔던 어제까지의 동지가 졸지에 적으로 변한 경우이다. 최근 단체장 출마 의향을 밝힌 이상범 전 북구청장이 당적 없이 출사표를 던진 것도 정치적 친정에서 그를 적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적과 동지 관계의 이야깃거리는 울산 북구에서 더 찾아낼 수가 있다. 몇 해 전 총선에서 대중적 인기가 대단했던 당대표를 삼고초려의 정성으로 세 번씩이나 유세장으로 모셔와 금배지를 달 수 있었던 어느 전직 의원이 “밤과 낮의 표정이 다르더라”는 소문을 뿌린 끝에 신발을 바꿔 신은 사례가 있었다. 당시 당락의 기로에서 절박한 심정이었던 선거캠프에서 ‘모시고자 한’ 명분으로 내세운 간청은 “대표님께서 한 번 다녀가실 적마다 1천표가 움직입니다”였다고 전해진다.

이번 선거에서 북구청장 자리를 놓고 도전장을 내민 대여섯 명의 정치인들 가운데는 ‘어제의 동지들’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후보 단일화가 그린 순탄치 않을 것이란 전망까지 나온다.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뭉쳤다.” 그런 합창소리를 과연 들을 수 있겠나 하는 탄식도 그래서 나온다.

여하튼 정치의 계절에, 다양한 얼굴의 정치인들이, 적과의 동침을 소재로 한 무수한 스토리텔링의 원천이 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봄기운이 막 감돌기 시작한 학성공원의 양지 바른 구석에서 한 정치논객이 소일하시던 어르신들을 상대로 우문(愚問)의 사자성어 놀이판을 벌였다.

“적과의 동침을 넉 자로 표현한다면?” “정치계절에 정치판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넉 자로 요약한다면?” “서로의 필요에 따라 갈라선 후에 어제의 동지를 원수같이 대한다면?”

되돌아온 현답(賢答)은 각각 ‘오월동주(吳越同舟)’ ‘합종연횡(合從連衡)’ ‘배은망덕(背恩忘德)’이었다.

광역시가 되기 전에 시의원을 지냈다는 어느 어르신에게 마지막으로 던져진 질문의 주제는 ‘우리 정치에 대한 소감’이었고 노정객의 답은 ‘정치무상(政治無常)’이었다.

/ 김정주 편집위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