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필(加筆), 개칠(改漆), 합작(合作), 개작(改作)
가필(加筆), 개칠(改漆), 합작(合作), 개작(改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2.1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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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모 일간지의 ‘ESSAY’란에 유명인의 글이 실렸다. 제목의 일부만을 여기게 옮겨도 누구의 글인지 금방 눈치를 챌 것 같아 차마 밝히지 못 한다.

이 유명인의 글은 돋보기로서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명문이었다. 문단을 나누는 기초부터 적절한 낱말의 선택까지 글줄이나 쓴다는 돋보기로서도 감탄할 정도였다. 그 글을 다 읽고 난 지금(2. 16 아침 7시), 씁쓸한 뒷맛이 가시지 않아 울산의 뜻있는 독자를 위하여 일의 옳고 그름을 가리자는 주장을 펼치기로 한다. 이것은 내가 좋아 선택하고 말고의 가치관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돋보기가 그 글을 읽게 된 동기는 단순하다. 돋보기의 취미와 관련된 용어의 글 제목이 눈길을 끌었고, 그 유명인이 고난을 딛고 일어서 스타가 된 뒤에도 평소에 보여주는 후덕하고 겸손함이 베여 있는 글이겠지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글 내용은 구구절절이 옳은 말이어서 전적으로 공감한다. 다만 그 글이 신문지상에 발표되는 과정에 독자와 필자를 우롱하는, 가필, 개칠을 넘어선 다른 사람과의 합작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개작은 본인이 써놓은 글을 본인이 스스로 고치거나 거의 새로 쓰는 거나 진배없이 상당부분을 수정할 때, 개정판과 같은 뜻으로 사용하는 낱말로 해둔다.

우선 돋보기는 과거에 10년 가까이 대학생들의 독후감 심사를 한 일이 있다. 이 과정에서 다른 곳에 실린 독후감, 독서평 등을 짜깁기하여 제출한 것들을 걸러내는 일들을 1차적으로 하였다. 이때, 돋보기의 글쓰기 경험에서 나오는 감(感)으로, 지나치게 매끄럽게 넘어가는 글(문단을 잘 지키는 글은 잘 넘어간다)과 문단을 지키지 않는다든가 문단과 문단 사이가 심하게 덜거덕 거리는 글을 골라내는 것이다. 진정성이 있어 보이며 잘 읽혀지는 독후감은 후보군으로 쌓아놓는다. 다음이 독후감에 사용된 어휘의 폭을 막연하지만 대학생 수준에서 가늠해본다. 하여간 남의 글을 진짜인가 가짜인가 판별하는 썩 좋지 않은 경력이 있다. 그 ESSAY 글은 지나치게 매끄럽게 넘어가는 글이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 나오는 공기번데기가 연상되었다. 어떤 글을 다른 사람이 가필, 개칠하였으면 그 글은 누구누구의 합작이지 개인의 이름으로 나가는 ESSAY가 아니다.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필자의 다른 글들이 이 ESSAY가 실린 일간지에 한 동안 실렸었다. 그 중에 ‘고향의 빈집들’이라는 글에 사투리 ‘뫼똥’을 의도적으로 썼는데, 칼럼 담당 기자가 ‘뫼똥’을 ‘묘지’로 바꾸어도 되겠느냐고 전화로 문의해온 일이 있었다. 지나친 사투리 같아서 양보하였다. 이렇게 글쓴이의 의견을 물어서 사투리조차도 표준말로 바꾸던 그 일간지에서 ESSAY라는 타이틀의 글을 대필(代筆)하여 실렸다면 독자를 우롱하는 것 아니고는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일이다.

이진섭은 소설 ‘동의보감(이은성)’의 발문에, 여기저기 써놓은 글을 모아 그럴듯하게 장정하고 ‘내 글’,‘내 말씀’입네 사기 치는 것을 개탄하였다. 이 말 속에는 선거철만 되면 대필로 책을 만들어서 배포하던 일, 선거법에 걸리지 않기 위한 방편으로 잔꾀부리기를 질책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물론 다른 목적으로 유명 드라마 작가의 재치를 빌어 재벌 총수의 일대기를 대필하였던 일도 있었지만 이것은 예외로 한다.

이와는 달리 신문이나 잡지 등에서 외부필자의 글을 담당기자가 함부로 손을 대는 우(愚)를 범(犯)하는 일이 있어 문제 삼는다. 받아놓은 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싣지 않아야 한다. 그런 필자를 선정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급한 마음에, 아니면 담당기자의 우월감으로 그 글을 고쳐서 게재한다면 독자를 속이는 것이고, 또한 글쓴이한테 ‘글은 이렇게 쓰는 것입니다’고 가르치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글을 쓰는 것은 하나의 창작품이다. 객관적 사실을 기술(記述)하는 기사조차도 기자의 작품과 같은 성격을 띠는데 남의 글에 손을 대는 가필, 서예의 개칠은 두 사람 이름을 밝혀 합작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 ESSAY 글이 합작이나 대필이 아니면 이 글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독자의 양해를 머리 숙여 바란다.

/ 박문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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