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 있는 박상진 의사 묘소
경주에 있는 박상진 의사 묘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2.10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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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공중파 매체에서 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있는 주말 드라마 ‘명가’는 경주 교동 최 부자(富者)의 원조격인 최국선을 그 주인공으로 삼고 있다. 그의 조부인 최진립 장군은 원래 경주 내남면에 살았으나 최국선이 부를 축적하면서 지금 고택(古宅)이 있는 교동리로 옮겨 왔다고 한다. 지금 그 드라마가 진행 중이니 결말이 어떻게 날지 미리 짐작할 순 없지만 이 집안은 그의 12대 손(孫)인 최 준이 재산 전부를 현 영남대학교 재단에 기증함으로써 막을 내린다. 웬만한 울산 사람치고 최 준과 박상진 의사가 처남 매부지간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 박 의사와 함께 최 부자가 독립 운동을 하면서 상해 임시정부에 독립군자금을 보냈단 사실도 알 만큼 안다. 하지만 울산출신 박상진 의사 묘소가 왜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생후 100여일 만에 양자로 입적됐고 네 살 때 큰 아버지가 사는 경주시 외동읍 녹동리로 옮겨 갔다면 당연히 박 의사 묘소는 울산이나 외동에 있어야 할 텐데 전혀 연고가 없는 내남면 노곡리에 묻힌 이유가 도대체 뭘까. 이 숨겨진 이유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의외로 경주 부자 최 준과 박상진 의사의 번민을 새로이 알게 할 수도 있다. 박 의사가 1921년 8월11일 대구 교도소에서 순국한 뒤 시신이 13일 경주에 도착해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에 안장된 것은 8월 20일이다. 무려 일주일이나 지나서 상(喪)을 치른 셈이다. 그런데 초상을 맡은 쪽이 바로 처가인 경주 최부자 댁이었다. 송정 박씨 후손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송정과 외동에 있던 박 의사 댁은 가세가 기울대로 기울어 산소조차 변변히 마련할 입장이 못됐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사대부 집안 출신답게 아무리 가난해도 처가 쪽에 몸을 뉘지 않고 본가를 찾았을 텐데 왜 하필이면 내남면을 택했을 까. 들리는 바에 의하면 당시 최 준도 일제로부터 장지(葬地)를 제공하지 말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이다. 매부가 고인 돼 처가에 와 있는데도 산소자리마저 제공치 못하도록 일제가 압력을 가했다고 하니 당시 주변 상황을 감지하고도 남는다. 그 사이에 끼여 인간적 고뇌를 겪었을 최준의 입장을 이해할 만하다. 이런 상황 때문에 유족들은 외동이나 울산 쪽으로 운구할 계획도 세웠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시간과 수송 수단이었다. 박의사를 대구에서 경주로 운구해 올 때는 철로를 이용했다. 당시 대구선은 박의사가 순국하기 4년 전인 1917년에 이미 대구와 영천사이에 개통돼 있었다. 이어 대구선은 1918년 영천과 경주 그리고 포항까지 연결됐다. 즉 대구에서 경주까지는 철로가 연결된 상태였다. 그러나 당시 울산과 경주를 잇는 철로는 개통되지 않았다. 부산과 울산, 경주를 연결하는 동해 남부선은 1935년 12월에 개통된 것이다. 결국 날은 찌는 듯이 무더운데 울산 쪽으로 운구하고 싶어도 수송 수단이 여의치 않아 경주 쪽에 묘소를 쓰기로 했을 것이란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울산 쪽으로 운구할 방법도 없는데다 장례식이 하루 이틀 지연되자 박 의사의 부인이 남 동생인 최 준에게 장지를 내 놓으라고 울부짖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인간적 고뇌와 함께 가문을 지켜야 했던 최준은 며칠을 고심한 끝에 ‘집안이 모두 망할 각오’를 하고 노곡리에 있는 선산을 장지로 정했다고 한다. 지금은 모두 당시의 상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채 그저 박상진 의사의 애국 충심만 기리고 있지만 순국한 날로부터 열흘간이나 묘 터를 잡지 못해 그의 영혼이 처가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것이 당시의 상황이다. 당대의 명문가에 태어나 만석꾼 집안 규수와 혼인했지만 나라를 위해 목숨을 버린 뒤에는 관(棺) 하나 제대로 묻을 곳이 없어 처가 선산에 몸을 의탁했던 것이다. 지금 박의사 묘소가 있는 곳은 최 부자의 시조(始祖)인 최진립 장군이 경주에 처음 터전을 마련했던 내남면 ‘덩개마을’과 지척 거리에 있다.

/ 정종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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