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양심(良心)
민족적 양심(良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1.25 20: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해, 이 시대의 큰별이 졌다. 고(故) 김수환 추기경. 그는 종교를 초월해 이 시대 모든 이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을 안겨 주고 간 고인의 깊은 사랑에 새삼 머리 숙여 진다.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빈다.

21세기가 막을 올린 지도 어느덧 10년째로 접어든다. 하루가 다르게, 아니 시간과 분·초를 다투며 세상은 무섭게 변화하고 있다. 각 분야마다 최첨단 기술력을 바탕으로 눈부신 발전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나 급속한 물질문명의 발달과 함께 찾아온 인간 기본 가치관의 흔들림은 종교의 영역에도 넘나들어,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가벼운 처신이 세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간혹 매스컴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몸은 비록 이 세상을 떠났지만, 우리 인간에게 진정한 종교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쳐 주고, 참된 삶이 어떤 것인가를 몸소 실천해 보여 준 몇몇 종교 지도자들이 아직도 우리 마음속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을 벌할 수 있는가. 범부(凡夫)인 내가 무슨 권리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나. 어떻게 사는 것이 참된 인간의 길인가.’

평양 복심법원(현재의 고등법원) 판사 이찬형(李燦亨ㆍ효봉(曉峰) 스님의 속명)은 3일간 식음을 전폐하고 고뇌했다. 조선인 최초의 판사로 법의(法衣)를 입은 지 10년. 그의 고통은 동포에게 내린 첫 사형선고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평안도 양덕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 일제(日帝)의 판사가 되었다. 판사로서 출세가도를 달리며 1남 2녀의 자식까지 둔 그였다. 식민지 조국의 암담한 현실에 눈을 감아버린다면 한 몸의 행복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수많은 동포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몸을 던졌다. 그러나 그는 조선인이면서도 독립운동의 동참자가 아닌 동포의 심판자였다. 일제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독립투사들의 단죄를 조선인인 그에게 맡겼다. 그는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지만, 독립투사는 동포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어느 순간 독립투사의 의연한 모습이 그의 영혼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방황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마침내 ‘법의는 출세와 영광의 상징이 아니라 양심을 옥죄는 번뇌의 쇠그물’이라는 결론을 얻기에 이른다.

‘이 세상은 내가 살 곳이 아니다. 내가 갈 길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의 위대한 버림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법관직을 버린 그는 곧바로 처자식을 둔 채 가출(?), 엿장수를 하며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다. 3년 동안 엿장수로 전국을 떠돈 뒤 그가 처음으로 간 곳은 금강산 유점사였다. 거기서 신계사 보운암(普雲庵)의 석두(石頭) 화상을 찾으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그곳에서 머리를 깎고 원명(元明)이란 법명을 받았다. 음력 칠월 초 여드레, 서른 여덟의 나이였다.

스승은 그에게 중국 조주선사(趙州禪師)의 무(無)자 화두를 내렸다. 그는 엉덩이가 짓물러 터져 방석이 달라붙어도 모를 정도로 피눈물 나는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절구통 수좌’였다.

1930년 늦은 봄, 그는 백척간두에서 몸을 던져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법기암 뒷산에 한 칸 남짓한 토굴을 판 뒤 밖에서 흙벽을 치도록 했다. 앞뒤로 공양그릇만 들고 날 수 있을 정도의 입구와 용변을 처리할 구멍만 냈다. 깨닫기 전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토굴 밖으로 나오지 않으리라는 맹세를 하고 토굴에 들어간 지 1년 반쯤 지난 어느날, 갑자기 토굴의 벽이 와르르 무너지며 필사적인 정진(精進)의 끝을 알린다. 마침내 깨달음을 얻은 것이었다.

서른 여섯 살 때 동포에게 내린 사형선고 앞에서, 몇 날 몇 밤을 뜬눈으로 지새며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고뇌한 효봉 스님. 비록 법관의 길은 버렸으나 불교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내기까지 평소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업적은 후세에도 길이 빛날 것이다.

/ 김부조 시인·동서문화사 부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