땔감 지고 다니던 길 도시인 산책로 변모
땔감 지고 다니던 길 도시인 산책로 변모
  • 김규신 기자
  • 승인 2010.01.14 20: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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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구영리 도는고개 가는길
울주군 범서읍 구영리는 급격한 도시화로 옛 모습을 잃어가고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90년대 초반 하나 둘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가보다 아파트 수가 더 많아진 곳이다. 그 아파트 사이에 옛길이 있다. 지금은 매끈하게 닦인 콘크리트길들이 바로 선대들이 지게 지며 우마차 끌고 다니던 그 길이다.

구영리의 ‘도는고개’는 돌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의 아버지, 삼촌, 형님들은 집안 온기와 소여물을 끓여 낼 땔감을 책임지기 위해 매일같이 무거운 지게를 지고 이 길을 돌고 돌았다.

그래도 이 길은 살가운 길이다. 먼 옛날 농경시대 서민들의 애환과 삶의 흔적이 묻어있고 또 추억이 서렸다.

도는고개는 울주경찰서를 출발해 마천루 같은 아파트 옆으로 난 커다란 연못에서 시작된다.

연못 이름은 구영 구못이라 한다. 많이 버텼다. 94년 지척에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오폐수와 쓰레기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더니 결국 공원화 결정을 통해 지난해부터 메워지게 됐다.

겨울철 구영 구못은 그 옛날 나무꾼들의 몇 안 되는 놀이터 중 하나였다.

찬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면 남녀노소가 앞 다퉈 연못 위 얼음판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지게 작대기를 지렛대 삼아 열심히 얼음을 지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점촌1리 박영식(71) 전 이장은 당시를 회상하며 “도시화가 되면서 옛길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데 그나마 점촌, 대리 등 각 마을을 구분할 수 있는 구영 구못마저 사라지게 돼 씁쓸하다. 앞으로 몇 년 뒤면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어 질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연못을 따라 구영초등학교 방향으로 가면 구영리 동문굿모닝힐아파트 뒷문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도는고개를 오르는 오르막길의 시작이다. 조금은 가파른 길을 거슬러 오르다 보면 시멘트로 포장된 숲속길이 나온다.

도는고개 가는길에는 특별한 지형물이 없다. 그래서 무덤이 이정표 역할을 해 왔다.

무덤 주위는 묘와 관련한 이름이 붙어 있다. 웃묫등, 아랫묫등, 솔배이묫등, 빨간묫등 등으로 불린다. 옛 사람들은 이 무덤들을 기준으로 어디까지 왔나 확인할 수 있었고 이곳에서 지게를 잠시 내려놓고 땀을 식히거나 다른 사람들을 기다리곤 했다.

동문아파트 후문을 막 지나면 왼편에 무덤이 하나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이 아랫묫등이다. 출발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오르막길 아랫자락에 있어 아랫묫등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반대로 도는고개에 가까워 질 즈음에는 웃묫등이 나온다. 아랫묫등과는 뜻이 반대다.

도는고개 중간에 위치한 솔배이묫등과 빨간묫등은 지리적 위치와는 상관없는 명칭이다.

솔매이묫등은 솔개가 아이를 낚아 채 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할머니와 또 그의 할머니, 할머니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명칭이다. 지금은 이장되고 없지만 구영리 토박이들은 정확하게 그 위치를 기억하고 있다.

빨간묫등은 주변 흙이 붉은데다 사람들이 거름 제작을 위해 낙엽을 모두 긁어가 민둥산이 되면서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사람들의 통행이 잦아지면서 예전 황토길이던 도는고개 가는 길은 지금은 차량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는 시멘트로 말끔히 포장돼 있다. 이를 기준으로 군데군데 샛길이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다. 선바위와 중촌 등 구영지역 곳곳이 이 길을 기준으로 통해 있다.

완만한 경사와 확 트인 공간은 산책길의 좋은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어 구영 주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계절 아름다운 새소리와 때때로 나타나는 다람쥐, 청솔모도 눈을 즐겁게 한다.

아랫묫등에서 40분 가량을 걷다 보면 이정표가 붙은 소박한 모습의 교차로가 나타난다.

도는고개는 이정표를 기준으로 배리끝·당만디, 선바위, 중리길 등 세 갈래로 쭉 갈라진 모습으로 사통팔달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사방으로 멀리 두동 방향과 구영리 아파트촌 모습이 보이고 병풍처럼 드리워진 산들이 이곳을 아늑하게 감싸고 있다. / 김규신 기자

7세 때부터 작은 지게지고

산지기 피해 오르내린 고개

범서읍 점촌1리 前이장 박영식씨

“도는고개 가는 길은 나무하러 가는 길이었지. 지겹게 다닌 길이라 눈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지. 당시에는 남녀노소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족을 위해 나무를 해 와야 불도 피우고 쇠죽도 끓일 수 있었거든.”

길 찾기에 동행한 점촌 1리 박영식 전 이장은 도는고개에 대해 이렇게 기억한다.

지금은 산에 나무가 많이 우거져 겨울철에 산불조심 단속반이 곳곳에 배치돼 있지만 40~70년대까지는 나무를 지키는 산지기가 있었다고 박 이장은 설명한다.

때문에 남의 산에서 나무를 했다가는 고역을 치르기 일쑤여서 산지기는 몰래 나무를 하는 나무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산지기는 낫과 지게를 압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뺏은 지게를 부수기도 했다. 산지기가 떴다 하면 도망이 상책이었다.

그래서 인근 산에서 나무를 하는 것은 모험과도 같았고 결국 멀리 도는고개를 넘어 산 곳곳을 헤매고 다녔다. 나무를 하다보면 옆집 동무도 있고 마을 주민도 있지만 때로는 멀리 울산 시내에서 도시락을 싸들고 귀한 땔감을 구하러 온 나무꾼도 제법 있었다고 회상했다.

“한 겨울을 나기 위한 땔감을 구하려고 몇 시간씩 걸리는 산을 매일 두세 번씩 올라야 했어. 나무꾼이 온 산에 버글버글했지. 생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가족의 하룻밤 온기를 위해 지게를 짊어진 사람이었지. 먹을 것이 풍부하지 않아 인근 무밭과 감나무 과수원에서 무를 뽑아먹고 감을 따먹으며 허기를 채운 기억이 나는구먼.” 박 이장의 추억담이다.

그는 지금 길옆으로 낙엽들이 지천으로 깔려 있지만 그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낙엽이 비료, 땔감으로 쓰기에 너무 좋은 자원들이어서 남아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시절에는 오가는 사람 누구나 갈쿠리로 낙엽을 긁어갔다. 낙엽이 쌓이기는 커녕 길을 가다 밥풀 하나 흘려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민둥산이었다고 말한다.

“7살 때 장에 가신 어머니께 조그만 지게를 사오셨지. 가족들을 위해 땔 나무를 구해오고,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지게는 없어서는 안 될 농기구였지. 그런데 그때는 평생 그걸 짊어지고 다닐 줄 상상도 못했어.”라며 70 평생을 지게와 함께한 사연을 들려주는 박 이장의 모습에서 옛날 조상들의 고달픈 삶이 엿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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