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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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10.01.06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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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거주하는 여류작가 권비영 씨가 쓴 장편소설 ‘덕혜옹주’가 새해 벽두부터 화제꺼리가 되고 있다. 옹주의 출생에서부터 성장기, 일본 유학 그리고 정략결혼에 이은 파탄과 정신병, 또 귀국 후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일대기를 사실과 상상력을 동원해 묘사한 이 작품은 센세이션을 넘어 많은 사람들이‘눈물을 흘리게 한다’는 소리가 들린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 고종을 여의고 13살 때 일본으로 건너가 18살에 일본인과 결혼해서 이듬해에 딸을 낳았으니 당시의 조혼(早婚) 관습을 십분 감안한다 해도 뭔가 서두르고 조급했다는 감이 든다.

고종과 궁녀 양씨 사이에 고명딸로 태어난 덕혜옹주가 한 많은 삶을 산 여인임은 분명하다. 태어난 지 9년 만인 1921년에 ‘옹주’로 봉작되고 ‘덕혜’란 호를 받았으니 황녀치곤 기구한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도 일본 황족들이 그녀의 모계(母系)가 궁인임을 문제 삼아 왕공족으로 인정하는 것을 거부했지만 1917년 총독 데라우치의 명령으로 왕공족에 왕녀로 정식 입적된 지 4년이나 지나서 이뤄진 일이기 때문이다. 조선 왕조가 그대로 이어져 왔더라면 어림도 없었을 일들을 그녀는 출생 때부터 겪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또 1931년 일본 황태후 사다코의 지시로 대마도 도주(島主) 소 타케유키와 결혼해 딸을 낳았지만 아이가 죽은 뒤 정신병을 앓다가 1953년 일본인 남편과 이혼하고 62년에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에 살다가 삶을 마감했으니 정말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다를 수도 있다. 고종은 정실부인인 명성황후 외에 9명의 후궁이 있었다. 명성황후의 아들이 조선 마지막 임금 순종이고 후궁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았던 엄귀비의 아들이 바로 순종의 뒤를 잇는 영친왕 이은이다. 고종의 유일한 딸이었던 덕혜옹주는 복녕당 장귀인이 낳았다. 1911년 엄비가 사망해 울적하게 지내던 고종은 자신의 회갑날 낳은 고명딸을 무척이나 귀여워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덕혜옹주는 이례적인 환대를 받았던 것 같다. 실록에 ‘왕녀가 태어나서 이토록 환영받은 전례가 없었다’고 기록했을 정도다. 아기를 낳자마자 산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가 내려졌고 다음 날 왕이 산실로 아기를 보러 갔으며 3일째 되는 날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 문안을 드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1912년이면 나라가 망한 지 2년째 되는 해인데 덕수궁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장면은 궁 바깥 풍경과는 사뭇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다섯 살이 됐을 때 궁안에 사립 유치원을 만들어 일부 귀족층 자식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하기도 했다.

1910년 8월 29일 발표된 한일병합 조약은 8조로 돼 있다. 1, 2조는 한일병합의 당위성을 적고있다. 이어 3, 4조는 왕족에 대한 예우와 처우에 관한 것이다. 특히 3조가 눈길을 끈다. ‘한국 황제폐하, 황태자 전하 및 그 후비와 후예가 각각의 지위를 누리게 하고 상당한 존칭과 위엄 및 명예를 향유케하며 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것을 약속한다.’로 돼 있다. 5조는 한일병합에 공을 세운 자들에게 포상하는 내용이며 6, 7조가 한국 국민에 관한 것이고 8조는 조약 시효에 관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한국국민에 대한 내용은 제일 끝부분에 추상적으로 기록돼 있을 뿐이다.

여기서 덕혜옹주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눠질 수 있다. 하나는 기구한 운명의 삶을 살았던 여인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라를 넘겨주는 대가로 자신들의 명예와 부를 누렸던 황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받아야 할 평가다. 전자와 후자를 엮어 소설화 한 ‘덕혜옹주’가 전자 쪽에 더 많은 비중을 두면 분명‘눈물을 흘리게 하는’ 작품이 된다. 그러나 후자에 무게를 두면 눈물까지 흘릴 내용은 못되는 것이 사실이다. 해방 후 귀국한 애국지사들, 특히 김구, 이승만 등이 당시 일본에 머무르고 있던 이(李) 왕가 후손들에게 냉담했던 것은 바로 후자에 더 많은 비중을 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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