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날의 회억
젊은날의 회억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2.30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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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후반 무렵 사회주의를 한동안 동경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를 경주에서 마치고 중학교는 대구로, 다시 고등학교는 서울로 옮겨간 ‘준 부르조아’ 출신이 그런 사고(思考)를 가졌다면 상당한 모순일진 몰라도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집안이 기울어 그 때까지 느끼지 못했던 현실을 깨닫게 된 것도 이유 중 하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는 초등학교 동창생이었다. 지금은 고인(故人)이 된 그 친구는 어릴 적부터 집안이 몹시 가난했던 걸로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그 친구는 추운 겨울에도 양말을 신지 않고 검정 고무신만 신은 채 등교하곤 했다. 한참 세월이 지나 더듬어 보니 점심시간마다 그 친구가 교실 밖 양지바른 곳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던 생각도 났었다. 그러나 그 당시 점심시간에는 그런 사실에 관심이 없었다. 양은(洋銀) 도시락을 누가 먼저 석탄 난로위에 얹어 점심을 따뜻하게 데워 먹느냐가 관심사의 전부였다.

초등학교를 어렵게 마친 그 친구는 집 가까이에 있는 사립 중학교로 진학했다. 이 학교로 진학한 이유도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알았다. 당시 그 사립 중학교는 정원을 못 채울 정도로 낙후돼 있어서 등록금을 일반 학교의 절반만 받는 조건으로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젊어서 남편과 사별하고 시장에서 산나물 좌판을 벌여 외아들을 키워야 했던 그의 어머니에게는 이마져도 힘에 겨웠던 모양이다. 결국 그 친구는 2학년을 마치고 이발소에 일자리를 구해 들어갔다. 15세 된 어린 아이가 할 일은 하나 밖에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머리를 깎은 손님들 머리를 감겨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1년 여 쯤 견습 기간을 거치면 면도하는 일을 맡게 되고 다음으로 ‘승진’하는 것이 정식 이발사였다.

좀 어색하긴 했지만 그 친구의 순수함을 알게 된 것은 중3 겨울방학 때 고향에 내려가 그 친구가 일하는 이발소에 갔을 때다. 그 친구는 주인 이발사에게 “얘가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닌다”면서 연신 자랑을 해댔다. 당시는 그렇게 떠벌이는 것이 무안키도 하려니와 쑥스러워서 그 이발소에 다시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친구가 자기보다 집안 형편이 좀 더 났고 상급학교에 진학한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사실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10대 시절을 보내고 20대 중반 무렵이 됐을 때 그 친구가 시 외곽 면(面) 단위지역에서 직접 이발소를 경영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1970년대 후반 잠시 고향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 친구는 제법 전문적인 미장(美匠)이었다. 중학교 까까머리 시절 이후 십 수 년이 지나 만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 친구의 자부심이었다. 그는 막걸리집 주인에게 황당할 정도로 수선을 떨어댔다. “이 친구가 서울에서 대학을 나왔는데 날 만나러 왔어” 그러나 그 때는 쑥스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았다. 형편없이 몰락한 친구를 변함없이 반겨주는 순수한 마음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해 겨울 12월 31일 날 밤 우리는 친구 몇 명과 어울려 고향 경주에서 밤늦도록 막걸리 잔을 기울였다.

그 날 밤 친구의 이야기를 통해 안 사실은 이듬해 봄 고향을 떠나 객지생활을 하는 동안 항상 맘 한구석에 남아 있었으며 가끔 사회주의를 동경하게 만든 동기가 됐다. 태어날 때부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갈 확률이 많다는 것이 우리사회의 모순임을 그 날밤 그 친구의 이야기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이발소에서 면도하는 견습 생활을 거쳐 이발사가 된 이 친구는 푼푼이 모은 돈으로 시외 면 단위 지역에 자신의 이발소를 하나 냈다고 한다. 그러나 영업이 제법 잘 돼가자 무면허 이발사란 고발이 들어와 2여년 만에 그 곳을 떠났다고 했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미장일을 배웠지만 일 자체가 계절을 타는 것인지라 수입이 일정치 않다고 했다. 여름 장마가 시작되면 미장일을 그만두고 수박이나 참외를 내다 팔았다. 겨울철 혹한기엔 군고구마 장사를 했다.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했지만 ‘목돈 만지기가 영 어렵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게다가 일찍 결혼해 낳은 아이가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도 했다. 그가 술에 얼큰히 취해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워낙 밑바탕이 없으니까 아무리 쏟아 부어도 독안에 물이 고이질 않아. 그래서 난 태어날 때부터 평등한 세상이 좋아. 넌 잘 모를 거야.”

세월 속에 묻혀 사느라 바빴다는 핑계도 댈 겸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어느 여름날 큰 아이를 데리고 그를 찾아 갔다. 가끔 이야기 해 줬던 ‘아저씨’에게 인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친구는 그보다 몇 해 전 지병(持病)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자신을 한탄하며 과음한다 싶더니 결국 그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오늘 다시 그 친구를 떠 올린다. 순수했던 젊은 영혼들이 백열등 아래서 막걸리 잔을 기울였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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