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 차단된 흙좋고 물좋은 둥근 두메
세속 차단된 흙좋고 물좋은 둥근 두메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2.28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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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환상지형 욱곡 1
울산의 땅속에는 거대하고 둥근 화강암 기둥이 곳곳에 있다. 직경이 2~4㎞다. 화강암 암주(岩柱)라 부른다. 울주군 청량면 율리를 비롯 두동면 은편리와 범서읍 욱곡리 3개 지역이 대표적이다.

화강암 기둥은 울산 땅을 이루고 있던 퇴적암을 화강암 마그마가 비집고 올라오다가 지하 수㎞에서 굳어진 것이다. 화강암 기둥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퇴적암이 깎여나가면서 지상에 노출된다.

노출된 화강암은 퇴적암과 함께 깎이지만, 퇴적암 보다 깎이는 속도가 빠르다. 화강암 주위의 퇴적암은 화강암이 굳어질 때 열에 의해 도자기처럼 단단하게 구워졌다. 그래서 화강암 기둥은 상대적으로 빨리 풍화돼 움푹하게 파인 분지를 이룬다. 차별풍화다.

율리 뒤 문수산이나 은편리 뒤 국수봉, 욱곡리 뒤 연화산에 올라가면 퇴적암이 굳어진 형상을 볼수 있다. 움푹 파인 곳은 두메라 불리고, 성스럽게 여겨진다. 율리의 영축마을 일대는 예로부터 신성한 곳으로 사찰이 밀집했고, 신라 종교개혁의 온실 역할도 했다.

문수산 영축마을엔 신라불교 탄생시킨 옛 사찰 즐비

울주군 청량면 율리와 영축 마을 일대는 화강암 분지다. 흙이 부드럽고 물이 맑다. 남암산·문수산·영축산에 둥글게 둘러싸인 두메다. 예로부터 두메는 사람이 살기에 좋은 곳이다.

이런 지질과 지형은 필연적으로 유서깊은 사연을 만들어 냈다. 지금도 울산인이 가장 친근하게 찾는 곳이 됐다. 이곳에는 문수암·청송사·망해사·영축사·혁목사 같은 유서있는 사찰이 있었다고 삼국유사가 전한다.

문수산을 중심으로 좌우에 펼쳐진 산의 모암은 울산지역의 기반을 이룬 퇴적암이다. 1억3천만년 전후에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 퇴적암은 6천만년전쯤 율리 일대의 화강암 기둥이 만들어 질때 열을 받아 달궈지고 단단해 졌다.

단단해진 부분은 남아 뾰족한 산 꼭대기를 이뤘고 이보다 무른 화강암은 차별적으로 많이 풍화돼 낮은 평지와 언덕을 이뤘다. 문수산을 비롯 3개의 산 6부능선까지가 화강암이다. 화강암이 있는 곳에 청송사와 망해사·영축사와 혁목암 터가 있다.

우리나라 유명사찰은 주로 화강암 지대에 있다. 통도사, 석남사, 불국사, 석굴암, 범어사 등이 그렇다. 한 연구가에 따르면 신라권 사찰은 주로 화강암 지대에 터를 잡았다. 그 터의 경사도도 15~20%로 완만하다.

화강암은 암석구성이 정련하다. 천천히 굳어졌기 때문이다. 굳어지는 데 600년 걸린다는 계산도 있다. 이런 암석은 풍화되도 부드럽다. 마사와 황토를 만들어 낸다. 이런 토양에 걸러진 물은 질이 좋다.

선사인들도 주로 황토가 많은 곳에 주거지나 묘를 사용했다. 연모가 변변찮아 파기 쉬운 곳을 선택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현대인 보다 자연을 활용하는데 눈이 밝았던 선사인이나 가람을 배치하는데 정성을 다했던 불교국가들이 왜 이런 곳을 좋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인들의 화강암 다루는 솜씨는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도 영축사 석탑 옆 개울가에는 화강암을 깨기 위해 정을 촘촘하게 밖은 흔적이 있다. 정이 깬 홈의 깊이는 10㎝ 가량인데 나무쇄기를 박고 물을 부어 팽창하는 힘으로 깬 자국이다. 1400여년전 영축사를 건립하던 신라 석공들의 자취다. 다만 문수암만 절벽에 걸쳐져 있다. 이곳은 퇴적암이 변성된 지대이다. 까마득한 절벽을 위태롭게 지나고, 거대한 암벽이 갈라진 틈새를 지나야 절에 이른다. 자연의 위의(威儀)에 겸손해진 뒤 성스러운 영역에 들어서도록 장치돼 있다.

유서깊고 아름다운 이곳에 울산시는 터널을 뚫고 산허리를 잘라 울주군 청량면 율리에서 삼동면 하잠리간 터널을 포함한 7.4㎞(너비 20m) 도로를 내고있다.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불가피하다면 이곳의 자연사와 인문역사를 살핀뒤 그에 맞게 건설되기만 바랄 뿐이다.

혁목암 위치 핵석으로 밝힌다

삼국유사에서 ‘등항’(燈缸)이란 단어를 봤을때 나는 잊혀진 옛 사찰 터 하나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항이란 등불을 켜는 항아리다.

삼국유사에는 울산 영축산 자락에 혁목암이란 오랜 암자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아직 위치나 유물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삼국유사 혁목암에 관련된 항목(피은 6 낭지승운 보현수)에서 “혁목암 터에서 땅을 파서 등항 2개를 얻었다”는 구절을 읽은뒤 나는 어쩌면 수수께끼를 풀 것 같았다.

땅을 파서 얻었다는 항아리 모양의 등은 돌로 된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둥글고 단단한 돌인데다 지금의 석등과 비슷했을 것이다. 또 진귀한 것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중요한 사건만 골라 쓴 삼국유사에 실렸다고 볼 수 있다.

일연스님은 울산에서 걸어서 한나절 거리인 청도 운문사에서 이 역사서를 쓰면서 혁목암에 관한 기록을 봤거나 승려들에게 들었을 것이다.

땅속에서 나온 둥글고 단단한 돌은 중등학교 지구과학 교과서에도 설명돼 있는 개념이다. 주로 화강암 지대에서 만들어지는 ‘핵석’인 것이다. 핵석은 ‘알돌’이라고도 부른다.

영축산 자락 곳곳에는 문수산과 연결된 등산로가 나있다. 이 길을 더듬으니 둥근 돌이 군데군데 보였다. 화강암이 땅속에서 풍화될때 모서리는 모두 떨어져 나간뒤 둥근 모습으로 남은 돌이다.

 이 일대는 핵석이 묻혀있었다. 일부 드러난 것을 보면 항아리 모양 장타원형도 있고, 어떤 것은 공처럼 둥근 것도 있다.

혁목암의 등항에 관한 기사는 바로 이 돌을 두고 말했을 것이다. 이 돌은 겉면은 자연풍화로 다듬어져 있기 때문에 적당한 크기의 돌을 골라 속 부분만 파내면 석등이 되기 때문이다.

인근에 있는 청송사 부도는 종 모양이다. 이른바 석종형 부도다. 이것 역시 길쭉한 핵석을 골라 3분의 1 부분만 자르면 부도가 된다.

낭지스님은 이차돈이 순교하던 그 해 이곳 혁목암 인근에서 첫 법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라 왕실이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쳐 이차돈이라는 한 신하의 목숨을 걸고 불교를 받아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려던 갈등기였다. 그때 왕성의 외곽인 울산의 영축산에서 과감하게 불교를 선교함으로써 공인을 앞당긴 것이다.

울산의 낭지스님은 이차돈의 순교와 대응하는 신라불교의 태동을 도운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울산의 영축산 기슭(지금의 영축마을)은 찬란했던 신라불교를 이룩한 성지로 기념돼야 할 것이다.

언젠가 이 일대가 발굴된다면 신라가 불교를 공인했던 서기 527년 혹은 그 이전에 세워졌던 아주 특이한 암자를 확인할지도 모른다.

혁목암터로 짐작되는 터에는 지금도 드러난 알돌 앞에 촛불을 켜고 치성을 들인 흔적이 있었다. 어쩌면 알돌에 대한 경외심이거나, 혹은 알돌이 놓인 장소에 감응한 것일 수 있다.

강원도 펀치볼도 차별풍화로 생긴 둥근분지

남한지역에 나타나는 환상구조에 관한 지형학적 연구(성신여대 박 경·2006년 한국지형학회지)는 위성영상을 통해 둥근 지형을 파악한뒤 지형학과 지질학 분야 기존 연구를 비교 검토했다. 경남 거창, 가조, 악양을 비롯 강원도 춘천과 원주 등의 분지에 대해 장재훈 등이 지형학적으로 연구한 내용을 소개했다. 이 지역은 둥근 지형에 도시가 형성된 것으로 직경이 10㎞인 분지형 도시도 있다. 대부분 외곽의 높은 지대는 단단한 변성암이나 퇴적암이 둘러싸고 내부는 화강암이 침식된 상태에서 만들어진 지형임을 설명한다.

강원도 양구군의 펀치볼도 동일한 구조임을 밝힌다. 이 지형은 김봉균과 박용안이 1967년 연구한 내용을 정리했다.

펀치볼은 이 연구가 있기전에 화산이 폭발한 화구이거나 운석이 떨어져 파인 곳이란 설 등이 분분했다. 그러나 분지 안쪽은 화강암으로 이뤄졌고 이를 둘러싼 능선부는 변성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차별침식에 의한 것으로 인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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