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도 됩니까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도 됩니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2.23 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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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공중에 다섯 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 같습니다.

일, 가족, 건강, 친구, 영혼의 공입니다.

이 중에서 ‘일’만이 고무공이고 나머지는 모두 유리공입니다.

고무공은 떨어뜨려도 튀어 올라오지만 나머지 공은 떨어뜨리면 깨지고 맙니다.

이 다섯 개 공의 균형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

이렇게 시작된 더글러스 테프트 전(前) 코카콜라 회장의 지난 2000년 신년사는 ‘어제는 역사고 내일은 비밀이며 오늘은 선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고 부릅니다’로 끝을 맺는다.

‘present’란 단어를 이용해 삶을 조명한 테프트 회장의 이 명언은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어떻게 그런 단어를 발굴해 의미를 부여했는지 그 기교가 절묘한데다 그런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 단어가 있다는 것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감동을 느끼려면 최소한 ’present‘ 란 단어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생긴다. 또 이 어휘가 ’현재‘란 뜻 외에 ’선물‘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아야 테프트 회장의 말이 가슴에 와 닿는다.

요즘 초·중·고 학생들은 영어 단어를 잘 모른다. 그냥 발음만 모방할 뿐이지 정확한 철자와 단어가 갖는 다양한 의미를 모른다. 발음도 한 번 들은 후에 겨우 따라 하는 정도다. 단어를 보고 자신이 직접 발음할 수 있는 아이들이 드물다. 이런 결핍의 발단은 1997년 EBS 방송에서부터 시작됐다. 그 당시 가계(家計)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25%를 초과하자 학부모 부담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교육방송을 시작했다. 이어서 학교는 교실마다 VCR을 배치하고 가정에서도 교육방송을 시청할 수 있도록 EBS가 방송을 학생들 귀가시간에 맞춰 조절하는 등 부산을 떨었다. 그 결과 상승 곡선을 타던 사교육 추세는 한 동안 주춤해졌다.

그러나 그 이후에 벌어진 일련의 폐단은 사교육 억제란 국가적 명제(命題)에 억눌려 비판대상에서 제외된 채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외국어의 경우, 교육방송이 아이들을 ‘발음할 줄 모르는 바보’로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발음하는 대신 TV화면에 나오는 강사들의 강의를 듣기만 했기 때문에 혼자서 말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것이다. 동시에 듣기 능력도 없어지게 됐다. 왜냐하면 듣기란 단어를 학생자신이 여러 번 큰 소리로 발음해 읽음으로써 그 음성이 귀에 익숙해져야 상대가 그와 같은 발음을 할 때 알아듣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즉 타인의 발음을 듣는 것 보다 스스로 그 발음을 반복해 귀에 익숙해져야 듣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입은 꽉 다물고 화면만 들여다보고 앉아 있으니 ‘영어 듣기’가 될 리 만무하지 않는가. 그런데 이에다 한 술 더 떠서 일을 망쳐 놓는 사람들이 있다. EBS 방송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대통령이 “한국 대학생들이 문법은 잘하는데 외국인과 대화 한마디도 제대로 못 한다”고 하자 그 다음 달부터 교육방송에 영어회화가 첨가됐고 사교육 시장 열기는 그쪽으로 옮겨 갔다. 그 때부터 우후죽순처럼 생긴 영어회화 학원들은 1~2년 전 까지만 해도 호황을 누렸다.

그런 아이러니는 현 정부 출범 초기에도 있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 정권 인수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던 모 대학 교수가 “우리나라 학생들이 ‘오렌지’ 발음을 잘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이번에는 각 대학들마저 영어회화 센터를 만드는 등 야단법석을 떨어댄 적이 있다.

교육과학기술부는 엊그제 현 중2학생들이 대학입시를 치루게 될 2014학년 수능시험에서 듣기 영역을 현행 17문제에서 25문제로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전체 영어시험 50문항 중 절반을 듣기 평가로 바꾸겠다는 내용이다. 내년부터 학교 수업에 회화교육 시간을 추가하 겠다는 내용도 발표했다. 이 발표에 이어 나온 시중의 관심사는 당연히 이런 조치로 인해 사교육이 다시 기승을 부릴 것이냐 아니냐에 쏠려 있다.

이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는 ‘부릴 것이다’ 쪽이다. 지금처럼 학생들이 영어단어를 쓸 줄도 모르고 읽을 수도 없는 상태에서 듣기 시험만 강화한다면 그들은 다시 사교육 시장으로 달려 갈 수밖에 없다. 그 동안 준비돼 있지 않았던 그들에게 사교육 기관들은 문제를 단기간에 해결해 줄 수 있다고 선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 종 식 주 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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