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당당함
그들의 당당함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2.21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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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5월 26일 중국 국민당 군 25만 명이 상하이에서 투항하거나 철수 했다. 이틀 뒤 공산당이 상하이를 완전 장악하게 된다.

장제스의 후견인으로 공산당원과 노동자 도살에 앞장섰던 정부군 3인방 중 한 명인 황진룽은 상하이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그가 떠나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변화가 무쌍한 때 일수록 변하지 않는 게 상책’이란 확고한 철학과 생활습관 때문이었다.

매일 목욕하는 것이 그의 습관 중 하나 였는데 상하이가 함락될 무렵 동지였던 두웨성이 홍콩으로 함께 탈출하자고 제의했지만 “나 같은 팔십 노인이 매일 밤 갈 수 있는 대중탕이 그곳에 있느냐?”며 거절했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이 눈엣 가시로 여기던 사람이 서민호 민의원 이었다.

그 는 1952년 거창 양민학살 사건 국회 조사단장으로 활동 중 당시 집권 측에서 보낸 서 모 대위의 암살 시도에 부딪치게 된다. 쌍방이 다투는 와중에서 서의원이 권총으로 서 대위를 사살, 군법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 된 뒤 서민호씨는 사상범들과 함께 수감된 적이 있었다. 그때 서 의원과 같은 감방에 북에서 내려 온 고위 간첩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 간첩은 북에 있을 때 남한의 검사에 해당하는 직위에 있었던 사람으로 남한 내의 간첩망 구축 상황을 점검하러 왔다가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아 두고 있는 상태였다. 사상은 달랐지만 그 사형수는 고매한 인격을 갖춘 인물이어서 서의원과 친근한 사이가 됐다.

이 사람은 특이한 버릇이 하나 있었는데 점심을 먹고 난 뒤 1시부터 2시 까지 꼭 낮잠을 자는 것이 었다. 친분이 있는 간수가 그 에게 사형집행 날짜 까지 귀띔해 줬지만 집행을 하루 앞 둔 날도 점심 식사 후 오수를 즐겼다.

형장으로 가는 날 쓰다 남은 치약, 비누 등을 서의원에게 나눠주기도 했다니 그의 냉철한 사고를 엿 보기에 충분하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의 평정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기간에 걸친 자기 수양과 신념에서 나 올 수 있는 것이다.

모 교수가 쓴 호랑이에 관한 글도 생각난다. 여러 마리의 호랑이가 한 마리를 집중 공격하는 일이 동물원에 가끔 있단다.

‘어느 날 오후 사육사가 말릴 틈도 없이 여러마리로부터 집중공격을 받은 호랑이 한마리가 복부에 심한 상처를 입고 물이 있는 작은 풀장으로 피했다. 다친 호랑이를 치료키 위해 직원들이 지프를 동원해 내실로 몰아 넣으려 했지만 그 호랑이는 물속에 앉아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한 시간 쯤 지났을 때 풀장은 피로 벌겋게 물들었지만 호랑이는 경계를 흩트리지 않고 평소의 당당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다른 호랑이들을 먼저 내실로 몰아넣자 그 때 서야 그 호랑이는 물속에서 몸을 일으켜 터져 나온 내장을 끌면서 내실로 향했다. 출혈이 심해 싸늘해 진 호랑이는 그 곳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당당했던 자세에서 불과 10도 안 돼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불출마를 선언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구차하지 않은 모습이 보기 좋다. 노정객의 당당한 위엄은 의정단상을 떠나도 그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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