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전 강동사람들, 해산물 이고 바삐 걷던 고갯길 - 달령재
30여년전 강동사람들, 해산물 이고 바삐 걷던 고갯길 - 달령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1.05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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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정저수지를 지나 달령재로 오르는 산길에는 낙엽이 밟혀 걷는 재미를 준다.
마을을 이어주던 고갯길에는 늘 호랑이와 산적이 나왔을 법한 이야기들이 숨어있다. 무룡산과 동대산 사이 능선을 따라 흐르듯 이어진 ‘달령재’를 넘는 산길이 그렇다. 지금은 무룡산의 수많은 등산로 중 하나에 불과하지만, 30여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강동 사람들에게는 내륙과 소통하는 생명과도 같은 길이었다. ‘통하는 고개’란 의미인 ‘달령재’라는 명칭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달령 혹은 달현, 달골재라고도 했다.

북구 송정동에서 강동동 달곡마을까지 4km 남짓한 이 길은 큰 걸음으로 1시간 조금 더 걸린다. 송정 쪽에서 첫걸음을 내딛은 곳은 무룡산에서 내려온 물길을 가둔 송정저수지다. 확 트인 수변과 군데군데 그늘진 숲, 산자락의 고운 단풍은 마음을 열게 만든다. 현재 저수지가 있는 곳은 바람이 많이 분다고 하여 날개뱅이라고 불렸다. 가는 길에 진산의 물맛을 느낄 수 있는 송정약수터도 만난다. 20여분 걷다보면 저수지가 졸졸 흐르는 개울로 변하고 갈대 군락지가 보일 즈음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된다.

갈림길에서 무룡산과 동화산 사이의 골짜기는 서당골이라 불리는 데 조선시대 때 어느 사람이 골짜기에 도원서당을 지었다는 것에서 유래한다. 울산문화원이 편찬한 울산지명사에 따르면, 도원서당은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에서 나온 별천지라는 뜻으로 붙여졌고, 무룡산의 옛 이름도 무릉산, 그 북쪽의 동화산은 도화산었는데 마찬가지로 이 책의 ‘무릉도원(武陵桃源)’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갈림길에서 서당골 맞은편 동대산 쪽 골짜기는 도둑골(도덕골이라고도 했음)이라고 불린다. 강동 사람들이 장에서 물건을 팔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들을 많이 만난다고 해서 이런 명칭이 붙어있다. 당시 우시장이었던 울산장에 소를 팔고 오는 날이면 더욱 극성이었다고 한다.

산길로 접어들면 저수지에 비치던 햇살은 울창한 수풀에 이내 묻히고 눅진한 숲 향기가 코를 자극한다.

구불구불하면서도 완만한 기울기는 걷기에 딱 좋은 느낌이다. 발밑에 떨어진 나뭇잎들은 자근자근 소리를 내며 걸음을 재촉한다. 초입부터 계속 이어지던 참나무 군락지는 어느새 소나무로, 또 떡갈나무로 바뀐다. 지금과는 다르게 예전에는 하도 나무를 많이 베어 거의 민둥산이었다고 한다. 중간에는 하나하나 쌓아놓은 돌무더기도 보이고 양지바른 둔덕에는 묘지도 있다.

20분 쯤 오르다 보면 차 한대는 족히 다니는 임도를 만나고 달곡마을까지 이 임도를 따라간다.

여기서부터 옛 정취가 사라져버렸다. 이러한 탓에 달령재도 그 흔적을 정확히 찾기는 힘들다. 달곡마을과 무룡산, 동대산으로 가는 삼거리가 나오는 부근이 달령재라고 한다. 고개를 넘어 내려가면 저 멀리 강동 바다가 보인다. 맑은 날에는 정자항과 시가지도 뚜렷하다.

호젓한 송정 저수지.

밋밋한 임도를 따라 내려오다 산길이 끝나는 달곡마을 근처에 들어서면 큰골저수지가 나온다. 송정저수지와 큰골저수지 모두 1970년대 중반에 농업용수로 쓰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저수지 맞은편에는 불매골이라 불렸던 골짜기가 있다. 지금은 그 흔적이 없어졌지만 달천에서 가져온 쇠를 호미, 낫, 칼로 만들던 대장간이 있었다.

달곡마을로 들어서면 이 마을 당산나무인 수령 150년이 넘은 팽나무와 엇비슷한 나이의 말채나무를 마주하게 된다. 필시 아름드리 나무 그늘이 정자로 가는 봇짐장수들의 발길을 잡았으리라.

   북구문화원 이세걸 이사
“나지막한 길 새벽녘 봇짐장수 오가던 소통의 길”

“어릴 적 호계장이 열리던 날, 새벽이면 열댓명이 봇짐을 메고 줄지어 산길로 넘어가고 해질 무렵 돌아오곤 했지요”

북구 강동동 달곡마을에서 평생을 살아온 북구문화원 이세걸(73·사진) 이사는 달령재에 대한 추억을 되짚어 나갔다.

강동에서 내륙으로 나가는 길은 달령재 말고도 장등마을~무룡산~매봉재로 넘어가는 길과 71번 국도가 있다. 이 중 달령재는 걸어서 갈 수 있는 길 중 가장 가깝다. 나지막하고 비교적 짧은 산길은 걸어서 넘기에 딱 좋다. 그래서 강동 사람들은 호계장과 울산장으로, 혹은 바깥 세상을 구경하려고, 내륙 사람들은 바다로 나가기 위해 이 길을 수도 없이 넘나들었다. 그들이 매고 간 등짐에는 나랏님에게도 진상됐다던 정자 돌미역과 당시 많이 잡히던 갈치, 고등어, 삼치가 있었다.

달령재 고래를 넘으면 강동바다와 정자 시가지가 보인다.

이 이사는 “해방 이전에 닦인 비포장 길인 71번 국도는 차나 자전거가 다녔고, 걸어서는 주로 달령재를 넘었다”며 “한번은 형수가 몸이 아파 호계까지 약을 사러가야 했는데, 40분 채 걸리지 않고 한달음에 넘어간 적도 있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그는 또 “봇짐장수들이 많이 다닌 탓인지 이 고개에는 산적이 있었고 고개 근처에서 호랑이도 나왔다는 얘기도 들었다”며 “달령재 근처에는 어른 키를 훌쩍 넘는 돌무더기도 있었는데 임도를 닦으면서 그 흔적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말했다.

60년대 어느 해, 몇 년 째 비가 오지 않아 무룡산 꼭대기 밑 큰 바위 앞에서 강동사람들이 모여 기우제를 지냈다는 기억도 들려줬다.

이세걸 이사는 이제 무룡산과 관련한 옛 얘기들을 아는 몇 안 되는 어른이다. 그는 무룡산과 길의 유래와 전설, 얘기들을 정리하고 있다. 달곡마을에서 서당도 운영하다 갈수록 아이들이 줄어 올해부터 그만뒀다고 한다.

/ 김준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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