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노년
아름다운 노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11.04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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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서 추해 보이는 것을 ‘노추(老醜)’라고 한다. 그 반대말을 굳이 찾아보라 한다면, 노년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노아(老雅)’란 말을 추천하고 싶다.

노아(老雅)는 11월 3일 저녁에 눈여겨볼 수 있었다. 울산예총이 마련한 ‘2009 예술인의 밤‘에서였다. 일흔 다섯의 원로 음악인 이상복 선생. ‘울산예총 고문’ 직함으로 앞자리에 앉았던 이 선생은 격려사를 미당 서정주의 대표작 ‘국화 옆에서’ 낭송으로 대신했다.

조동화 시인의 ‘나 하나 꽃이 되어’를 준비해 온 박맹우 시장의 깜짝 이벤트를 능히 눌러 덮을 만한 이벤트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늘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의 이 선생은 낭송의 끄트머리를 곡(曲)이 붙여진 가곡으로 매듭짓는 멋도 선사했다. 연세가 아흔이시라는 울산예총의 산 증인 김태근 선생의 인사말씀도 좌중에 숙연함을 가져다주었다.

“내 딴에는 울산예총을 위해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내 나이 구십. 며칠 안 있으면 구십 한 살이 되니까 오래 살았지요. 그동안 병원 한 번 안 가 봤고 몸에 칼 한 번 안 대어 봤습니다. 여러분들도 나만큼 오래, 건강하게 사셔서 울산을 위하는 훌륭한 예술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원로 잘 모시기로 소문난 60대 후반의 서진길 울산예총 고문이 마이크를 물려받았다. 서 고문은 두 분에 대한 덕담을 펼쳐 보였다. ‘아름다운 노년’을 칭송하는 덕담이었다.

“김태근 선생님은 순수예술 정신으로 살아오신 분입니다. 이상복 선생 또한 낭만적이고 시적이면서도 욕심 없이 자연과 더불어 사시는 순수한 분입니다. 순수한 인생, 두 분 다 그래서 건강한 모습을 여러분들에게 보여주실 수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영호남 8개 시·도의 수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수필문학회가 하나 있다. 동서(東西) 지역 간에 앙금처럼 남아 있는 지역감정의 벽을 허무는 데 한 마음이 되자는 뜻에서 19년 전에 만들어졌다. 이 모임의 19회째 출판기념회가 열린 것은 한동안 ‘유엔의 날’로 기억되던 10월 24일, 부산 해운대에서의 일이었다. 노아(老雅)는 그곳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다.

‘범주(凡珠)’란 아호에 박우야전(朴又也全)이라는 길고 재미있는 성함을 지닌 여류수필가. 교단생활 45년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을 맞이하셨던 보통연세 여든다섯의 자상한 할머니. ‘박 선생님’은 불편한 노구에도 불구하고 1박2일의 강행군을 젊은이 못지않은 인내심으로 견뎌내고 계셨다.

“김 회장님, 이제는 문을 열어 놓았답니다.”

말씀을 듣는 순간 말문과 함께 목도 막혀 오는 것 같았다. 이승을 하직할 마음의 준비가 다 되셨다는 말씀인데, 어떻게 대답을 돌려드려야 좋을지…. 지난해 진도에서, 지지난해 울산에서 그 비슷한 말씀을 들었을 때만 해도 곧이듣기지 않았는데, 올해는 사뭇 기분부터가 달랐다.

장기자랑 시간, 여러 인생 후배들의 부축을 받아가며 가까스로 무대에 오르신 박우야전 선생님. 평소 그토록 즐겨 부르시던 대중가요 ‘사랑의 미로’는 2절을 넘기기가 무척 힘들어 보였다. ‘문을 열어 놨다’던 말씀을 절감한 것은 다음날 오전, 전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유엔공원’으로 향하는 관광버스 안에서였다.

“울산 회장님, 시력이 예전 같지 못한 것 같네요.”

사실 그랬다. 1미터 앞의 지인이 누군지도 분간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목소리를 몇 차례 듣고 나서야 겨우 사람을 확인하셨다. 아름답고 잘 가꾸어진 창 너머 유엔공원의 산책은 눈으로만 하고 계셨으니, 예년에 없던 일이었다.

화제가 출판기념회로 넘어가는 시점에 넌지시 여쭈었다. 원고를 어떻게 정리하시는지 궁금해서였다.

“넓은 종이에 굵은 글씨로 써서 주면 옆에서 다시 정리해 주는 제자가 있지요.”

원고를 컴퓨터로 쓰시는 줄로만 알았는데…. 하여간 박 선생님은 그 연세에도, 혹 마지막일지도 모를 네 번째 수필집 ‘둔감의 지혜’를 펴내셨다. 지난 2월, 부산가톨릭회관에서 출판기념회가 있을 거라는 전갈을 받고도 얼굴 내밀지 못한 송구스러움 때문에 감히 말도 못 꺼내고 있는데 박 선생님께서 한 말씀을 던지신다.

“내 둔감의 지혜, 남는 건 몽땅 울산으로 가져가십시오, 회장님.”

울산을 유난히 사랑하시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다. 추하지 않고 아름다운 노년. 나도 ‘범주(凡珠)’ 선생님을 좇아 ‘노아(老雅)의 방주’에 함께 오를 수 있을 것인가?

/ 김정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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