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토 동남단 지키던 최일선 순라꾼 다니던 곳은 산책길로 변해
국토 동남단 지키던 최일선 순라꾼 다니던 곳은 산책길로 변해
  • 염시명 기자
  • 승인 2009.10.22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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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천강을 비롯해 북구지역과 무룡산, 멀리 동해까지도 볼 수 있는 울산의 주요 방어지인 병영성으로 올라가는 오솔길.

 

온갖 풍상 견뎌온 성벽길 1km

곳곳에 애국지사 흔적 볼수 있어

살다보면 가까이 있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거나 잊고 지내게 된다. 그럼에도 우리의 무심함을 탓하지 않고 같은 자리에서 버텨주는 것들이 있다. 병영성 둘레길이 그런 것 중 하나다.

옛 동동, 서동 지역 주민들의 갈증을 해소했던 산점샘에서부터 시작되는 병영성 둘레길은 한글의 정비와 표본을 만들기 위해 옥고를 치렀던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를 거쳐, 3.1절 조국의 광복을 위해 애썼던 지사들의 위폐를 모신 삼일사, 임진왜란을 거쳤던 병영성까지 이어져 약 1km 정도다.

빠르게 걸으면 겨우 한 시간 남짓이면 모두 둘러볼 수 있는 짧은 거리지만 길 곳곳에 초목이 우거져 있고 오르막 내리막이 적당히 섞여 지루할 틈도 없다. 유적지를 끼고 있어 볼거리와 함께 선조들의 애국정신을 느낄 수도 있다.

 

▲ 하루에 3천섬이나 솓아나며 여름에는 시원한, 겨울에는 따뜻한 지역 주민들의 식수원으로 자리잡았던 산전샘은 1970년대 개발과 함께 묻혀졌다가 2001년 5월 다시 복원돼 그 모습만 유지하고 있다.

 

약 400년 전 조성된 산전샘은 당시 병영성 인근 주민들과 병사들의 식수로 이용됐고 해방 뒤에도 수질이 좋아 미군부대에서도 사용됐고 멀리 부산과 대구까지도 실어갔다.

이런 산전샘 뒤편으로는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와 병영성으로 넘어가는 길가로 대나무가 늘어선 계단길이 있다. 과거 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병영 안으로 넘어가던 아낙들의 소로였던 이 길은 산전샘 복원과 함께 계단길로 바뀌었다. 외솔 생가로 넘어가기 위해 이 길로 들어서면 시원한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숲의 ‘스르륵’ 소리가 들리고 이는 스산함보다는 ‘이제 왔느냐’며 반기는 정겨움이 느껴진다.

중간중간 마주치는 길게 늘어진 덩굴과 단풍나무들을 지나 길 끝까지 오르면 80~90년대 달동네에서 볼 수 있던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 사이로 꼬불꼬불 골목들이 펼쳐진다.

이곳에서 아래로 2~3분 거리를 내려가면 외솔 선생의 복원된 생가가 보이고, 오른쪽으로 들어서 4~5분 걸으면 삼일로 지하차도 위에 자리잡은 병영성을 만날 수 있다.

병영성은 1907년까지 군사 목적으로 이용되다 민가가 들어서면서 대부분 훼손됐지만 북문 일부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일부 흔적을 남기고 있다. 1417년부터 1894년까지 존속한 병영성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의 영성으로 둘레는 9천316척, 높이는 12척에 달한다. 사적 제320호로 지정된 조선 시대의 포곡식성이다. 골짜기를 감싸고 구릉 정상부에 쌓여진 병영성은 병마절도사의 공관인 체오헌, 객사인 선위각 등과 함께 무기와 군수물자를 보관한 창고 등이 있었던 경상도지역 육군 사령부였다.

임진왜란 동안 수많은 전투를 치러 왔을 병영성은 이제 일부 전투의 흔적을 안고 있는 성벽과 그 터만 남았다. 3m가 넘는 높이로 쌓인 성벽을 이뤘던 바위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사이사이 점토와 자갈이 있던 자리를 이름 모를 들풀과 들꽃들에게 내어주면서도 여지껏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병영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동쪽으로 바라보면 동천강과 함께 무룡산 등 북구지역도 한눈에 들어온다. 멀리 바다까지 보여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새삼 알 수 있다.

 

▲ 400년을 존속했던 병영성의 마지막 남은 북문성벽 옆으로 아스팔트 도로가 휘감듯 지나가고 있다.

 

병영성을 내려와 번영로 방향으로 3분만 걸어가면 오른쪽에 300년 후에 다시 한번 침략한 일제에 항쟁한 3.1운동 열사들의 위패와 이들을 기리는 삼일충혼비가 안치된 삼일사에 당도한다. 사당 양쪽으로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크게 우거진 삼일사 앞에 서면 일제의 탄압에 맞서 투쟁했던 병역 지역민들의 강인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마음이 느껴진다.

다시 삼일사에서 병영로를 지나 반대쪽으로 1~2분만 걸어가면 오른쪽에 최근 복원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생가를 만날 수 있다. 외솔 선생은 일제강점 시절 울산에서 한글보존을 위해 힘썼던 대표적인 애국지사다. 이곳에는 선생의 작품과 유품 등을 안치한 현대식 기념관과 함께 그가 살았던 3채의 초가집, 뒤뜰에 마련된 내외무덤비와 푯돌이 자리 잡고 있다. 생가 옆켠에 있는 작은 광장과 이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9그루의 소나무들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과 횡포 속에도 굴하지 않았던 선생의 강직한 성격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병영 둘레길을 돌려면 중구 서동 외솔생가나 삼일사, 또는 중구 동동 383번지에 위치한 산전샘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은장도·담뱃대 공방 즐비했던 병영장

성문통해 오고가던 장꾼 모습 떠올라

5대째 성안에 산 우정항씨

“대학시절을 빼고는 69년 평생을 병영성 내에서 살았습니다.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제 아들에 손자까지 5대가 이곳에서 살고 있으니 병영지역이 변해온 모습을 대부분 지켜봤던 산증인이지요”

우정항(69.사진)씨는 1940년 울산 중구 서동지역에서 태어나 아직까지도 병영초등학교 뒤편에서 3대가 함께 살고 있다.

우씨가 20대 때까지만 해도 크게 성행했다는 병영장은 5일장으로 언양장 만큼이나 컸다. 병영성의 남문 밖 지역에는 말과 소 등의 가축에게 먹일 사료를 팔고 샀던 등겨전, 현재 병영교회 아래 쪽에서는 매일 같이 장작을 짊어지고 온 나무꾼들로 인해 나무전도 열렸었다. 게다가 은장도.담뱃대.가죽 제품들을 만들어 내는 공방들이 곳곳에 무리지어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시장에는 볼거리들로 항상 넘쳐 났다.

우씨에 따르면 경주에서 오는 사람들은 북문을 통해서, 울산읍에서 오는 사람들은 서문을 통해서, 장생포.방어진에서 오는 사람들은 동문과 남문을 통해서 각각 병영성 내로 들어왔다. 장사를 위해, 물건을 사기 위해 수 십리 길을 걸어왔을 사람들은 꽤 먼거리에서도 볼 수 있었던 병영성의 옛문들을 나타나면 도착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산전샘은 그가 결혼을 했던 1960년대까지도 빨래터와 식수원 역할을 했다. 그는 고교시절까지 동천강에서 멱을 감고 병영지역으로 넘어올 때 항상 산전샘을 들러 시원한 냉수를 들이켰다고 떠올린다. 우씨가 어릴적에는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주전자를 들고 왕복 20분 거리의 길을 뛰어 산전샘 물을 받아왔는 데 한여름에는 무더운 땡볕아래서도 집에 도착하면 주전자 겉면에 서리가 낄 정도로 시원했다. 겨울철 어머니와 함께 가족들의 옷가지를 들고가 빨래를 할 때는 발을 담글 만큼 따뜻하기도 했다.

6.25전쟁을 거치며 부산, 경주, 언양에 머물렀던 미군까지도 이 물맛을 알고 물차를 이용해 하루에 수 톤씩 식수로 퍼갔다.

 

▲ 공동우물이었던 산전샘에서 빨래하고 쌀씻고 물을 긷는 아낙네들의 모습에서 일상의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1967)

“미군 뿐만 아니라 한국군도 이곳의 물을 식수로 많이 사용했죠. 어린 나이에 커다란 물차들이 하루 몇차례 다녀가면 그 모습이 너무 신기에 친구들과 함께 차 뒤를 따라다녔어요. 주민들이 식수를 사용하고 그렇게 물을 날라갔는데도 마르지 않았던 것을 보면 하루 3천섬(한 섬은 약 2가마)씩 나왔다는 말이 신빙성이 없는 얘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씨는 당시를 회고하며 이후 지역의 개발로 산전샘이 모습을 잃은 것에 대해 탄식하기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병영지역에서 사람들이 물을 길러 산전샘으로 가기 위해서는 병영성의 옛 동문을 지나야 했다. 문의 형상을 모두 갖추진 않았지만 양쪽 기둥과 기둥옆으로 늘어섰던 성벽의 일부가 있었다는 것이다.

“어렸을 땐 그 기둥이 뭘 의미하는지 몰랐지만 자라면서 병영성 동문의 양쪽 기둥이란 걸 알았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동문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던 것 같은데 외지로 대학을 다녀오니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우씨는 이 부분이 못내 아쉬운 듯 설명을 이어갔다. 서문지역이 6.25사변 이후 집을 짓는 주춧돌로 사용되기 위해 마구잡이로 훼손됐는데 작게나마 남았던 동문의 흔적마저도 사라졌다는 것이다.

우씨는 “병영성을 문화재로 보호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큰 시야를 가지고 점차적으로 복원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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