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속의 일본
울산 속의 일본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8.02.15 2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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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본 동북아 수송회랑 네트웍의 아다치 히데오 사무국장이 울산 항만공사를 방문했다고 한다. 울산항과 일본 호쿠리쿠 지역 항만 간의 교류협력과 지난 2004년 폐쇄됐던 양국 간의 정기 여객선 운항 재개에 관한 의견 교환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리적 위치 탓으로 울산과 일본의 인적, 물적 교류는 조선 초기부터 시작됐다.

1418년 세종이 염포(지금의 현대 자동차 선적장 부근)에 왜관 설치를 허락하면서 부터다. 왜에서 건너 온 상인이나 관리들이 이곳을 거쳐 안동이나 문경세재를 거쳐 한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왜인들은 왕래만 가능했고 상주는 허락되지 않았다.

양국 간의 교역 물품은 주로 쌀이었는데 규모가 커지면서 1426년 염포를 개항하게 된다. 이때부터 지금 북구 염포동 삼거리 지석비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왜인 거주지가 생겼고 상당수가 상주했던 것으로 보인다. 양국 간에 최초로 공식 어업관계가 성립된 것도 이 시기다.

1510년 삼포 왜란으로 염포에 있던 왜인 거주지가 폐쇄 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까지 조, 왜 간의 교류는 두절 됐고 염포도 교역 무대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북구 학성동 소재 학성공원도 일본과 관련이 있다.

정유재란 때 가등청정이 울산읍성과 병영성을 헐어 만든 것으로 왜군이 일본으로 완전히 철수 할 때 까지 주둔했었다. 근대에 들어오면서 울산과 일본 관계는 더 심화됐다.

지금 삼산동은 이름 그대로 봉우리가 세 개 있는 산이였는데 일제 강점기 채석장으로 개발되면서 일부가 헐려 나갔다.

1928년 당시 삼산면에 일제가 비행장을 개설하면서 나머지 부분도 마저 없어 졌다고 한다. 당시 울산 삼산 비행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두 가지 특이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1929년 4월 개장 된 서울 여의도 비행장에 앞 선 국내 최초의 비행장이였다는 점이다.

또 일제시대 삼산 비행장이 국제공항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했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당시 비행기는 비행거리가 짧아 중간 기착지에 들러 급유를 해야 했다.

일본 오사카나 후쿠오카에서 이륙한 비행기가 처음 급유 하는 곳이 울산이였기 때문에 이곳이 대륙으로 가는 전초기지였던 셈이다.

1931년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면서 삼산 비행장은 단단히 한 몫 해낸다.

삼산에서 이륙한 전폭기가 서울, 평양, 신의주를 거쳐 중국 대련으로 날아 간 뒤 북경, 남경 폭격에 참가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패망하는 1945년 8.15일까지 상당수의 일본군이 울산지역에 남아 있었던 것도 비행장 수비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방을 맞은 한국인들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시도 하던 중 쌍방이 충돌을 빚어 위기를 맞은 적도 있다. 어쨌든 오랜 역사를 통해 울산과 일본은 긴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한 때는 일본으로 건너가는 한국인이 많아서 울산, 일본 간 정기 여객선이 성시를 이뤘었다.

2002년부터 시작된 정기 노선이 폐쇄된 이유는 이용객 급감 때문이라고 한다. 한국인들이 이제 일본에 갈 필요가 많이 없어 진 모양이다.

하긴 요즘 신혼 부부 대부분은 일본보다 유럽이나 동남아를 선호한다고 하니 격세지감이다. 울산과 일본 사이에 오랜 인연이 있었던 만큼 상징적으로 라도 정기 노선이 재개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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