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9.03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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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사회의 기득권층인 바리새인들이 눈엣가시인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 참으로 계략 하나를 짰다. 지령을 받은 그들의 제자들이 헤롯 당원들을 데리고 예수를 찾아가 짐짓 물었다. “가이사(Caesar,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예수가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고 요구하자 그들은 데나리온(은전·銀錢 이름) 한 닢을 보여줬다. 예수가 말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개신교성경 마태복음 22장 15절-21절).

다른 지방에서 보기 힘든 유난한 현상들이 울산에서는 이따금 시야에 잡힌다. 그 중 하나가 일부 문화예술인들의 튀는 행동이요, 그 중 돋보이는 것이 특정 정당에 떼 지어 가입하는 일이다. 문인들도 더러 있지만 미술인들은 그 수가 더 많다.

실례의 말씀이지만, 이분들의 입당(入黨) 동기는 정치적 신념과는 대부분 거리가 멀다. 쉽사리 거절 못하는 인적 연결고리 탓도 있겠지만 간혹 입신(立身)을 위한 선택도 눈에 띈다. ‘인적 연결고리’란 시쳇말로 ‘안면에 받혀서’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게 만드는 ‘인맥(人脈)관계’로 풀이해도 좋다. 그 이면에 반사이익을 노린 사심(私心)이 도사리고 있다는 점도 공통분모의 하나다.

재미난 것은, 집단입당이 선거철을 앞두고 동시다발로 일어난다는 점이요, 선물로 ‘정치완장’이 한 장씩 돌아온다는 점이다. 그 완장이란 것이 전국적으로 워낙 많이 뿌려져서 희소가치가 떨어질 만도 한데 얻어 찬 당사자들은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다. 도토리 키 재기나 다름없을 터인데도 완장의 크기를 놓고 입씨름 벌이는 일도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 누가 더 큰가?” 하고 서로 다투는 모습과 겹쳐지기도 한다.

그러나 자타가 인정하는 ‘거물급’이라면 문제가 좀 다르다. 감투를 인민군 훈장처럼 주렁주렁 매다는 이도 있고, 정치적 양명(揚名)을 노리며 목에 힘주는 이도 있다. 여하간, 예사롭지 않은 반대급부가 그들 차지라는 것만은 사실이다.

하루는 ‘예총’ 직함을 가진 정치지망 인사에게 질문을 던졌다. 돌아온 답은, 정계 입문이 지역 문화예술 발전의 밑거름이 되고자 하는 충정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민예총 양반들도 진보정치 하겠다는 사람들 아닌가?” ‘프로문학’ 논쟁이 오늘 이 바닥 문화예술계에도 재현되려는 것인가? 아차 싶어 더 깊이 끼어들기를 삼갔다.

※‘프로문학’=프롤레타리아문학(proletariat文學)= 프롤레타리아의 생활을 소재로 그들의 사회·정치적 이념을 표현하는 문학. 예술을 계급적 존재에 의해 결정되는 것으로 보고 계급적 이해를 위한 투쟁 형태로 인식. 우리나라에서는 1925년 ‘카프’ 즉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이 결성되면서 그 형태가 나타났다.)※

도대체 ‘정치완장’과 문화예술은 어떤 함수관계에 있기에 저리도 법석들일까? 그런 분들을 ‘연구대상’으로 삼은 적 있다는 어느 호사가는 그 상관관계의 엷음에 대해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허나, ‘정치적 문화예술인’의 존재는 엄연한 현실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란 지혜로운 명귀(名句)는 설교자의 시각에 따라 몇 갈래 다른 해석이 나온다. 여기서는 그 의미를 지극히 단순화시켜, 당당하게 정가(政街)를 활보하는 지역의 일부 문화예술인들에게 대입해 보고자 한다.

“정치는 정치인에게!”

그 까닭은, 문화예술의 순수성이 간직되기를 바라서이다. 더불어, 때 묻지 않은 동료 문화예술인들이 정치로 오염되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다수의 문화예술인들은 제 어미의 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니는 태화강의 비오리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 김정주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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