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독립운동가 ‘이종희 선생’
9월의 독립운동가 ‘이종희 선생’
  • 김경진 기자
  • 승인 2009.08.31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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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중국망명 이후 민족 독립위해 평생 헌신
국가보훈처는 의열단원과 광복군 제1지대장 등으로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이종희(李鍾熙·1890~1946) 선생을 ‘9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31일 밝혔다.

전라도 김제시 금산면 용호리에서 태어난 선생은 한말 동학 남접의 조직을 비롯해 금산사를 배경으로 한 미륵신앙의 혁명적 사상과 역사를 토대로 민족의식을 키워가다 1919년경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1919년 조직돼 일본인 관리 암살 및 관청 파괴를 주도한 ‘의열단’에 정식단원으로 가입해 중국 상해에서 일본군 다나카기이치(田中義一) 대장 살해사건에 가담했으며, 1926년 1월에 광주로 이동해 다른 10여명 단원들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제4기 보병과에 입학해 재광동조선혁명군인회와 유월한국혁명동지회에 참여하면서 혁명운동의 열기를 만끽하고 새로운 운동의지를 다져갔다.

1926년 10월에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 소위로 임관한 선생은 남창 주둔 국민혁명군 부대에 배속돼 근무하면서 의열단 남창지부원으로 계속 활동하는 한편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교관으로서 한인청년 사관 양성에 힘썼다. 이러한 청년 투사 양성 및 조직의 운동역량 강화로 의열단의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립의 결실을 맺게 됐다.

1937년에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으로 약산 김원봉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이끌어갔고, 이어 1938년 조선혁명간부학교 졸업생을 포함한 100여 명의 정예요원들로 구성된 조선의용대 조직에 참여했다.

1942년 12월 광복군 제1지대에 편입해 총무조장으로 활약하다 1943년 김원봉의 뒤를 이어 제1지대장을 맡아 항일무장투쟁을 이끌어나갔다. 또한 1943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원 전라도 대표 및 임시 의정원으로 활동했다.

병상에서 해방을 맞은 선생은 귀국선을 타고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1946년 4월29일 고국 땅을 밟기 직전 배안에서 눈을 감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김경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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