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과 융통, 그리고 친절
원칙과 융통, 그리고 친절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09.08.06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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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의 친절 수준은 시청이 제일 낫고 그 다음이 구·군→읍·면·동 순이라고 아시면 될 겁니다.”

행정의 최전선인 읍?면?동사무소에서도 근무해 본 경험이 있다는 울산시청의 중견 공무원 K씨의 말이다. 그의 지론인즉, 하위 행정조직일수록 상대하는 민원인 수가 많고 그러다 보니 자연히 친절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일선에서 고생이 많은 하위직 후배 공무원들을 감싸 안으려는 배려에서였겠지만, 초로(初老)의 신사 A씨의 체험적인 느낌은 조금 달랐다.

평생 승용차라곤 가져본 적이 없는 A씨는 얼마 전 아침 출근길에 20분 남짓한 거리의 ‘주민센터’를 걸어서 찾아갔다. 근무처에 제출할 민원서류를 급하게 뗄 일이 생긴 때문이었다. 그러나 민원창구에 다가간 순간 “아차!” 하는 자탄과 함께 금세 난감한 처지에 놓이고 만 A씨.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이 그만 주민등록증이 든 지갑을 빠뜨리고 온 것이었고, 자칫 훤한 대낮에 자신의 신분을 분실하는 망신을 당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기대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근무처에 같이 제출할 자료로 옛날에 작성해 두었던 이력서가 두어 종류나 있었고, 자신을 입증해 보일 또 다른 증빙자료-예를 들면 대학졸업증서 같은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용기가 치솟으면서 그럴듯한 변설을 늘어놓은 A씨는 그의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어른스럽지 않은 제스처까지 섞어 가며 양해 구하기를 시도했다. 그러나 웬걸, 서류발급 창구 일을 맡은 20대 초반의 여직원은 그를 단박에 실망시키고 말았다. 보기 좋게 거부의 몸짓을 보이고는 짐짓 시선을 돌리고 말더라는 것이었다.

출근 시간이 마음에 걸리던 A씨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기로 맘먹고는 앞서 궁리해 둔 ‘기타 증빙자료’를 차례로 꺼내 보이며 통사정에 들어갔다. 하지만 한번 거절이 영원한(?) 거절로 이어질 줄은 미처 몰랐다. 달리 손 쓸 방도도 없었다.

‘소통의 부재’를 느낀 그는 시선을 돌려 센터長(동장)이라도 계신지 두리번거렸지만 주민상담실에는 민원인들만 몇몇 이야기를 주고받을 뿐 주인장은 없었고 “동장님은 외출 중”이라거나 “휴가를 가셨다”는 응답만 돌아왔다. 온몸에 달아오른 열기를 감지한 A씨는 최후의 수단으로 이번에는 사무장을 면담해 보기로 했다. 서류발급원에 써넣은 것과 똑같은 한글과 한자 이름에다 주민등록번호까지 똑같은 서류를 네 가지나 내보였지만 모조리 허사였다. 사무장이란 사람 역시 애써 시선을 피해 가며 어린 여직원이 하던 말을 거의 그대로 앵무새처럼 되뇔 뿐이었다. 사진이 붙은 주민등록증이 있어야만 민원서류 발급이 가능하다는….

평소 점잖다는 평판이 자자하던 A씨였지만 이날만큼은 이성을 잃었는지 몇 차례 언성을 높이고는 무안한 표정과 황당한 기분에 휩싸여 주민센터를 달아나듯이 빠져나와야 했다. 다음날 주민등록증을 제시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서류를 발급받을 수 있었던 A씨는 창구 여직원이 올 상반기에 업무를 갓 배우기 시작한 ‘인턴 공무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리고는 생각을 정리하고 나름대로의 결론에 만들어 보기로 했다. 아하! 이런 게 한때 공직사회에 널리 번져 있었다는 소위 ‘무사안일(無事安逸)’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는 거로구나! 민원창구의 어린 여직원이나, ‘신문고’로 달려가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 보시라는 식으로 당당하게 대꾸하던 사무장까지도 같은 태도 아니던가?

그런 후 A씨는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처지를 바꾸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민원인을 친절하게 대하라고 귀가 닳도록 복무 교육을 받았기로서니, 뻔히 다칠 일을 내가 왜 해?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스트레스가 쌓여 죽을 지경인데…” 시청에 근무하는 중견 공무원의 말도 재삼 음미해 보았다. “그렇지! 그러기에 아래 조직으로 내려갈수록 친절도가 떨어진다 했으니, 우리 민원인들이 공무원들을 이해해 주어야 해.”

‘원칙’과 ‘융통’의 사이를 골똘히 생각하던 A씨는 그러나 아쉬운 게 딱 한 가지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그래서 이런 잡념을 쉬 떨칠 수 없었다. “가만 앉아서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벌떡 일어서서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하는 자세를 눈여겨볼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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