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생각에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3.01 22: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살아가면서 하고픈 말을 다 하면서 살 수는 없다. 아파도 아프다고 하지 못할 때도 있고, 넘치도록 행복해도 굳이 말로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해도, 가슴으로나마 잘된 일이라고 축복해 주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외롭고 슬플 때, 세상에 혼자라고 느낄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함이 안타까운 것을 꼭 말로 해야 할까. 멀리서 지켜보는 아픔은 말로는 다 못 한다. 진실은 가슴속에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눈으로 마음의 창을 열면, 세상은 더욱 넓고 아름답게 보인다.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틀렸다 말하지 말자. 틀린 게 아니라 단지 다를 뿐이다. 틀렸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의미지만, 다르다는 것은 같지 않다는 뜻이다. 당신과 내가 틀린 게 아니라, 살아온 시간과 생각이 다른 것이다. 우정이든 사랑이든 모두 각자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부딪히고 조금씩 양보하고 서로가 다르다는 걸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서로를 향해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삶에 정답이 없듯, 우리 관계에도 정답은 없다. 먼저 용서하고 마음을 열면, 아름다운 향기가 가득한 사회공동체가 될 수 있다.

산꼭대기에 오르면 행복하리라 생각하지만, 정상에 오른다고 다 행복한 건 아니다. 어느 지점에 도착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그런 곳은 없다. 같은 곳에 있어도 행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편엔 불행한 사람도 있다. 같은 일을 해도 즐거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짜증 내는 사람도 있다. 같은 음식을 먹지만, 기분이 좋은 사람과 기분 나쁜 사람이 있다. 왜 그럴까? 같은 물건, 좋은 음식, 멋진 장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다. 무엇이든 즐기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억지로 마지못해 하는 사람은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살아오면서 쉼표와 마침표를 제 자리에 찍어보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또한, 인생을 오선지에 옮겨 그렸을 때 구간마다 틈틈이 쉼표가 놓여 있길 원했다. 하지만 걱정을 앞당겨 불안해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나로서는 그것마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속도를 내기 위해 근력을 키우듯, 속도를 늦추는 데도 연습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여유는 시간의 잉여분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인생을 통째로 뒤엎을 필요는 없다. 작은 습관의 변화만으로도 충분하다.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으면 더욱 쉽다.

버스나 지하철은 한 정거장 일찍 하차해서 걸어 다니고, 천천히 핸드드립 커피를 마신다. 횡단보도의 점멸 신호가 깜빡일 때 무리해서 건너지 말고, 최단거리 대신 음식 냄새 솔솔 풍기는 골목길로 에둘러 돌아간다. 주말에는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지도 보내지도 말고, 식빵을 토스터 대신 석쇠에 서서히 굽는 것 또한 노력의 연장선상이다. 인생엔 연습이 없다지만, 단단한 생활에는 훈련이 필요하다. 미처 챙겨오지 못한 책의 아쉬움도 잠시, 이내 책 같은 건 읽지 않아도 좋다는 안도가 실바람처럼 마음을 스친다.

나무 막대기처럼 딱딱한 것은 부러지기 쉽고, 바위처럼 굳고 단단한 것은 깨지기 쉽다. 오히려 물처럼 부드러운 것은 쇠망치로도 깨트릴 수 없다. 부드러운 것은 소리 없이 스며든다. 물의 흐름을 막아버리면 물은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다가 어느샌가 물길 트인 곳으로 흘러간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옹벽을 치고 막아놓아도, 물은 보이지 않는 틈 사이로 스며든다. 세상에 스며드는 것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뇌되는 것도 비슷한 이치다.

스며든다는 것은 아무도 모르게 젖어 들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것이 언제나 강하다. 부드러운 것을 이기려는 행동은 무모하기 짝이 없다. 오기나 배짱으로 부드러움을 이길 수는 없다. 막무가내로 막아서다가는 어느 순간 부드러움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부드러운 것은 따뜻해서 무엇이든 포용할 수 있다. 우리의 생각도 물처럼 부드러워야 한다. 생각에 부드러움이 스며들면, 얼굴이 너그러워진다. 감추어도 절로 피어나는 넉넉한 미소가 된다. 나는 매일 사색을 연습하고 있다.

이동구 본보 독자위원장·RUPI사업단장, 4차산업혁명 U포럼 위원장,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