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4주년을 기념하며…
3·1운동 104주년을 기념하며…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2.27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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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게 느껴지던 겨울도 끝자락을 맞이하고 있다. 어느덧 낮에 비치는 햇살이 부쩍 따스해지고, 겨울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매화가 하얀 꽃망울을 터트리는 것을 보니 봄이 오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3월은 저마다 설렘과 기대 속에 새봄을 맞이할 준비로 분주한 때이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숭고하고 뜻깊은 역사가 쓰이던 때이기도 하다.

1919년 3월 1일에 일어난 3·1운동은 한국이 일본의 강압적 식민지 정책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겨냥해 일으킨 대표적 민족운동이다. 이날은 제1차 세계대전 후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주장에 힘입어 한용운, 손병희 등 민족지도자 33인이 종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한 날이다.

3·1운동은 남녀노소와 신분과 계층을 떠나 한목소리로 우리 민족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세계만방에 천명한 국민 주권 운동이었다. 또한, 우리나라 각지는 물론 해외까지 퍼져나가 세계적으로 매우 보기 드문 대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전승국의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독립운동이었던 탓에 다른 식민지의 독립운동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울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전국으로 퍼져나갔고, 울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9년 4월 2일 언양을 시작으로 4월 4∼5일에는 병영, 4월 8일에는 남창에서 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병영에서는 이틀에 걸쳐 시위가 벌어졌다. 만세운동은 첫날, 병영 일신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고, 이튿날은 그 전날 하상면 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하다 검거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진행되었다.

울산에서 가장 먼저 독립운동이 일어난 언양 지역은 일찍이 교구가 설립될 만큼 천도교 세력이 급성장하던 곳이었다. 언양 독립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것은 당연히 언양의 천도교 신자들이었다. 이무종·이규인·이성영 등 언양 천도교인들은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한 끝에 1919년 4월 2일 언양 장날을 만세운동 날짜로 정하고 비밀리에 사람들을 모았다. 장날로 인해 언양 주위 각 면에서 사람들이 모여든 기회를 이용해 독립 만세를 외쳤고 준비된 태극기를 흔들며 2천여 군중들과 함께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일제가 작성한 「조선 소요사건 상황」에는 언양의 만세운동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월 2일 언양면 읍내에서 700여 명의 군중이 투석, 기타 광포 행위를 감행하므로 발포로 진정시켰다. 이것이 이 군 소요의 시초이다.’ 그 무렵 언양에서는 일제 경찰의 무분별·무차별적인 진압으로 만세운동 참여자 가운데 17명이 부상하고 26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체포된 애국지사들은 징역형이나 태형을 받는 등의 고초를 겪었다.

언양 3·1운동은 이 운동에 참여했던 언양 청년들이 이후 ‘언양청년회’를 결성해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지역사회 운동과 항일 독립운동을 활발하게 펼쳐나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 울산시는 2001년 3·1독립운동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 주관으로 ‘3·1독립운동기념비’를 건립하여 독립 만세운동에 참여한 선열들의 희생을 기리며 후대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3월, 서울 도심에서 시작된 독립 만세운동은 전국 곳곳의 도시와 농촌에 빠르게 퍼져 5월까지 진행되었다. 독립을 염원하던 우리 민족의 열망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해외에까지 퍼져나가 만주, 연해주, 미국, 일본 등 다양한 나라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만든다. 그때의 우리 선조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간절히, 우리나라에 따스한 봄이 다시 찾아오기를 몸과 마음을 다해 바랐을 것이다.

올해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4주년이 되는 해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해를 거르지 않고 매년 푸른 잎과 향기로운 꽃을 피워내며 봄이 오는 소식을 전하는 꽃나무들처럼 우리도 그날의 함성이 후대에도 길이 기억될 수 있도록 이날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할 것이다.

김경태 국가보훈처 울산보훈지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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