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춤의 역사적 흐름
울산 춤의 역사적 흐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3.02.14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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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대 무용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R 교수는 수십 년째 필자와 소통하고 있다. 필자는 70년대 말까지 선친 김덕명으로부터 지성 승무, 양산학춤, 통도사 학춤, 나례무 등의 생성과 연기, 설화에 대해 배웠다. 또, 동래 온천장 권번에서 강창범 선생으로부터 장구와 허튼춤을 배운 권번 문화의 경험자다. 그 덕분에 한국학춤 문화의 요체에 대한 이론을 정립할 수 있었다. 필자와 R 교수가 학문적으로 소통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R 교수와의 최근 만남은 입춘날에 이뤄졌다. 교수는 녹화 장비를 설치하면서 작정한 듯 ‘울산 춤의 역사적 흐름’을 물었다. 삼국유사, 노봉의 시, 계변 설화 등 자료를 짚어가면서 설명했다. 오랜 시간 다양한 자료와 담론을 통해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이번 기회에 울산 무용의 후학을 위해 정리했다.

신라 화랑도의 수련 방법은 크게 ‘도의로써 서로 단련하며, 가락으로써 서로 기뻐하며, 먼 곳의 산천을 찾아 유람하여 즐기기(相磨以道義 相悅以歌樂 遊娛山水 無遠不至)’의 세 가지다. 화랑의 수련에도 가락은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울산 대곡천의 천전리를 찾아 암벽에 글자 흔적을 남겼다. 울산은 신라권역의 계변(戒邊)이었다. ‘계변’에는 외적으로부터 왕성(王城)을 방어하는 첫 보루(堡壘)라는 의미가 있다. 관문(關門)과 해문(海門), 그리고 많은 성이 있었던 이유다. 계변은 쌀과 소금과 토철이 생산되던 역동적인 지역이었다. 세 가지 물산은 지역경제의 풍족함을 보장했으며, 여유는 악가무(樂歌舞)의 고장으로서 손색이 없었다.

울산 춤의 역사적 흐름은 크게 처용무, 전화앵, 울산학춤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세 춤은 신라 시대가 배경이라는 공통적 특징이 있다.

먼저 처용무다. 《삼국유사》 〈처용랑망해사〉 조에는 신라 제49대 헌강왕이 개운포에 출유(出遊)한 기록이 전한다. “그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에 들어와 왕정을 보좌했는데, 이름을 처용이라고 했다. (중략)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물러났다(唱歌作舞而退)”. 처용의 이름과 처용이 노래와 춤을 췄다는 사실을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처용과 처용무는 경사(京師)에서 생성되었지만, 학성(鶴城)이 바탕이 됐다.

다음으로 전화앵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고적 열박령 조에 ‘열박령은 동도기 전화앵이 묻힌 자리’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 시대에 한림학사를 지낸 노봉(老峯) 김극기(金克己)는 열박령에 있는 전화앵의 무덤을 찾아 조시(弔詩) ‘조전화앵(弔?花鶯)’을 지어 바쳤다. 전화앵이란 이름에서 용모를 짐작할 수 있고, 시어에서 노래와 춤의 주요어인 ‘가선(歌扇)’과 ‘무삼(舞衫)’ 등을 찾을 수 있다.

끝으로 울산학춤이다. 《경상도지리지(1425)》 〈울산군〉 조에는 “계변성을 신라 시대에 신학성으로 개칭했다. (중략) 천복 원년 신유에 쌍학(雙鶴)이 온전한 금신상(金身像)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울산학춤은 1997년 계변 설화의 내용 중 ‘쌍학교금신상(雙鶴咬金身像)’의 주요어를 바탕으로 창작됐다. 계변 설화는 ‘신학성 장군’으로 불리던 울산 박씨의 시조 장무공 박윤웅의 이야기로 알고 있다.

울산학춤은 학의 몸짓을 모방한 춤이다. 특징은 수채화적이면서 선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너울너울, 덩실덩실, 우줄우줄, 징금징금 등 대표적 춤사위 표현인 의태어에서 느낄 수 있다. 춤 동작은 다양하고 사실적이며 섬세하다. 의상은 춤 동작이 부각될 수 있도록 흑색, 붉은색, 황금색을 첨가했다. 춤사위는 쉼 없는 반복과 다양한 표현으로 무수(舞手)의 여유와 관객의 편안함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양새로 자리매김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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