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 습지, 그곳에선
가재가 노래하는 곳 - 습지, 그곳에선
  • 이상길 취재1부 부장
  • 승인 2023.02.0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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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1969년 미국 노스 캐롤라이나의 바클리 코브 습지에서 한 구의 시체가 발견되면서 시작된다. 죽은 이는 체이스 앤드류스(해리스 디킨슨)라는 이름의 20대 남자로 높은 망루에서 떨어진 것으로 추정됐다.

하지만 경찰은 시체에서 발견된 빨간 털실을 이유로 그곳 습지에서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카야(데이지 에드가 존스)라는 이름의 소녀를 의심하게 된다. 카야의 집에 빨간 털실 모자가 있었던 것. 카야는 결국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의 손에 붙잡혀 감옥에 가게 되고, 체이스 살인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된다. 카야에게는 그녀를 변호해줄 국선변호인 톰 밀턴(데이빗 스트라탄)이 붙게 되고 영화는 이제부터 겨우 스물을 넘긴 카야가 습지에서 혼자 살게 된 이유를 찬찬히 보여주기 시작한다.

습지는 슬픔이 많다. 육지와 물을 이어주는 습지는 바다나 강처럼 물에 완전히 잠겨 있진 않지만 일 년 중 일정 기간 이상은 물에 잠기거나 젖어 있기 때문. 카야의 삶이 그랬다. 화목할 수 있었던 가정이었지만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였던 아빠의 폭력으로 인해 카야가 어렸을 때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됐다. 처음에는 엄마가 집을 떠났고, 그 뒤로 언니들과 오빠도 떠나고 말았다. 폭력적인 아빠와 단 둘이 남게 된 카야. 하지만 얼마 뒤 집을 떠난 엄마의 편지를 받고 화가 난 아빠까지 사라지면서 결국 어린 카야는 홀로 습지에 버려지게 됐다.

그래도 습지는 생명력이 넘치는 곳이었다. 고사리손으로 홍합을 캐서 마을 식료품 가게에 팔아 생계를 유지했고, 또래 아이들의 편견과 냉대로 학교를 다닐 순 없었지만 카야는 습지의 자연으로부터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그렇게 카야는 어여쁜 소녀로 성장해갔다.

그렇게 소녀가 된 카야는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런 독백을 한다. “습지는 늪이 아니다. 습지는 빛의 공간이다. 풀은 물속에서 자라고, 물은 하늘로 흐른다. 허나 습지 곳곳에는 진짜 늪이 있다.”

진짜 늪. 그렇다. 그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이다. 습지에 버려져 혼자 살고 있는 예쁜 소녀에겐 또래 남자가 접근해 왔는데 테이트(테일러 존 스미스)는 집을 나간 친오빠 조디의 친구였다. 어려서부터 카야를 아빠의 폭력으로부터 지켜주려 했던 테이트 역시 습지에서 혼자서 놀곤 했고, 한 번은 습지에서 길을 잃은 카야를 구해주기까지 했다. 그 일로 어린 카야는 홀로 버려진 뒤 느꼈던 슬픔 이외의 감정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바로 ‘위로’였다. 그렇다. 이쯤 되면 이제 습지는 ‘삶’이라는 거대한 공간으로 확장된다.

어렸을 땐 크리스마스만 다가와도 설레고 행복했지만 어른이 되면 달라진다. 이젠 새로울 게 없는 하루하루 속에서 마음은 점점 탄력을 잃어가고 슬픔은 날마다 쌓여 간다. 햇빛이 바랜 시트에도, 세면대의 칫솔에도, 휴대전화 이력에도, 또 혼자 걷는 거리에도. 그렇게 삶은 습지로 변해 간다.

허나 바다나 강과는 다른 습지는 물기(슬픔)가 마른 날도 있기 마련. 뜨거운 태양같은 사랑이 습지를 내리쬘 땐 모든 게 달라진다. 카야에게 테이트가 그런 존재였다.

테이트로 인해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는 카야. 하지만 테이트는 대학 진학을 위해 카야를 떠나야 했고, 다시 슬퍼질 수밖에 없었던 카야는 습지의 자연으로부터 이렇게 위로받는다. “자연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그랬다. 습지는 슬픔의 공간이지만 슬픔은 슬픔으로 인해 위로를 받기도 한다. 슬플 땐 슬픈 영화나 음악이 위로가 되듯이.

하지만 습지는 카야에게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도 있을 수 있다는 것까지 가르쳐주진 않았다. 그저 잠시라도 빨리 상처를 잊고 싶은 마음에 기댔던 것 뿐인데 체이스는 나쁜 놈이었다. 그래서 죽었다.

그 죽음에 대해 마을 사람들의 편견으로 법정에 서게 된 카야가 말한다. “습지는 죽음에 관해 남김없이 알고 있고, 죽음을 비극은 물론 죄악으로도 여기지 않는다.”

사실 대자연이 그렇다. 그건 옳고 그름 따윈 모른다. 사자가 사슴을 잔인하게 잡아먹는다고 그게 악한 건가. 오랜 친구 같은 습지에서 자라면서 뛰어난 동식물 연구가가 되어 책까지 내게 된 카야가 출판사 사람들에게 말한다. “반딧불이는 두 개의 다른 불빛 신호를 갖고 있어요. 하나는 짝짓기를 위한 거구요. 하나는 수컷을 유혹해 먹이로 삼기 위해서죠. 곤충(자연)에겐 도덕이란 게 없어요. 자연에 어두운 면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난관 속에서도 생존하기 위한 그들만의 독창적인 방식이 아닐까 싶어요”

어디 습지(자연)만 그럴까. 어른이 되어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으면 그 순간 옳고 그름 따윈 아무 것도 아니다. 그땐 그저 내 편 들어주고 내 손 잡아주는 사람이 선(善)이자 옳음, 아니 ‘빛’이 아닐까. 습지를 따사롭게 비추는. 2022년 11월 2일 개봉. 러닝타임 12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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