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특집-만나봤습니다] “운명처럼 만나… 울산이 좋아 강동에 눌러살죠”
[신년특집-만나봤습니다] “운명처럼 만나… 울산이 좋아 강동에 눌러살죠”
  • 김정주
  • 승인 2023.01.01 22: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레데릭 랑뻬리에-안경희 씨 부부
안경희(왼쪽)-프레데릭 랑뻬르 부부의 다정한 모습.
안경희(왼쪽)-프레데릭 랑뻬리에 부부의 다정한 모습.

62회 생일을 지난해 12월 27일에 맞은 프레데릭 랑뻬리에(Frederic Lamperier) 씨. 울산시 북구 강동 P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지 햇수로 어언 3년이다. 코로나19 사태로 고향 방문을 단념한 시기와 묘하게 겹친다. 그의 고향 프랑스 루앙(Rouen)은 파리 북서쪽 센강 하류에 자리한 오트노르망디의 중심 도시.

◇ “‘백수’ 말뜻은 white hands?”

프레데릭이 잘하는 한국어는 우스갯말로 별로다. 그래도 장난기 하나는 못 말린다. ‘백수’란 말로 기선을 제압하고는 씩 웃는다. 더 있다며 너스레까지 떤다. “‘배고파요’, ‘맛있어요’, ‘감사합니다’란 말도 알아요.” 손님 대접 거리를 챙기던 3년 연하 부인 안경희 씨가 몇 마디를 거든다. “백수란 말, 누가 가르쳐 주더래요. ‘white hands’라며…. ‘더워요’는 여름에, ‘추워요’는 겨울에 (남편이) 잘 쓰는 말이죠.”

“그 말이 하나의 철학처럼 다가오나 봐요. ‘실업자’란 의미가 아니라…. 프레데릭은 캐리어(career, 경력) 같은 건 신경 안 쓰는 남자니까요.” ‘백수’에 대한 경희 씨의 부연 설명이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듣고 있던 사진 담당 장 기자가 문득 떠올린 표현이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1990)에서 존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알려준 경구다. 고대 로마시인 호라티우스의 라틴어 시(詩) 한 구절로 ‘오늘(인생)을 즐기라’는 뜻이 담긴 말이다.

경희 씨가 손수 구운 먹음직한 쿠키를 프랑스풍 접시에 담아 방문객에게 내민다. 주방 유리창문 너머로 짙푸른 강동 바다의 수평선과 그 아래 찰싹거리는 파도가 인상적인 몽돌해변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반대편 거실 장식장은 경희 씨의 섬세한 솜씨가 묻어나는 원색의 꽃들로 화사하다 못해 현란하다.

호칭이 궁금했다. 경희 씨는 인터뷰 내내 남편 프레데릭을 ‘오빠’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늘 그런 것도 아니란다. “굿 무드(good mood)일 땐 ‘오빠’지만 배드 무드(bad mood)일 땐 ‘아저씨’예요. 비율이 99대 1이긴 하지만요.” 경희 씨의 눈웃음에 장난기가 가득하다. 부부의 의사소통 수단은 주로 영어와 프랑스어.

◇테제베 KTX 참여가 ‘부부의 緣’으로

프레데릭 부부와의 만남은 정말 우연이었다. 지난해 12월 11일, 중구 G 갤러리에서 열린 섬유예술가 김우연(본명 김희자) 작가의 개인전 개막행사에 초대 손님으로, 말 그대로 ‘우연히’ 자리를 같이했었다. 알고 보니 칠순의 김 작가와 프레데릭은 한때(2009~2010) 울주군 언양읍의 같은 아파트에서 친교를 나눈 이웃사촌 사이. 김 작가는 그런 인연으로 2015년 프랑스 노르망디(Normandie)의 국제 초대전에 출품, 우수상을 끌어안는 영예도 얻는다.

프레데릭이 프랑스 테제베(TGV) 운영사인 ‘SNCF’(프랑스 국영 철도여행사) 명함을 들고 한국 땅을 밟은 것은 월드컵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던 2002년 2월의 일. 한국고속철도가 테제베를 KTX 공사의 파트너로 삼은 것이 계기였다.

프레데릭이 경희 씨를 운명처럼 만난 것도 바로 이 무렵이었다. “서울역 근처 사무실에서 제가 영어 통·번역사로 근무할 때였죠. (경희 씨는 서울여대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고, 불어는 졸업 후 프레데릭을 만나 '알리앙스 프랑세즈'와 파리의 학교를 다니면서 익혔다.) 서로 부서는 달라도 제 사무실엔 프랑스인 기혼자도 계셨는데, 프레데릭은 이 분의 부인이 끓여준 보온병 커피에 반해 들락날락했어요. 한 번은 불어로 ‘봉주르(bonjour)’라고 인사했는데 그게 둘 사이를 가깝게 만들 줄은 미처 몰랐죠. 그때 전 37살 노처녀였지만 안 좋은 고부 관계 얘기도 이따금 듣고 해서 결혼할 생각은 별로 없었는데, 그만….” (이 무렵 프레데릭은 3년 연상의 마흔 살 노총각이었다.)

그러자 분위기를 눈치챈 프레데릭이 슬쩍 대화에 끼어든다. “Best gift for my life”(내 인생에 가장 멋진 선물)란 말에다 “경희, only one wife”(경희는 단 하나뿐인 아내)라는 말까지, 한마디로 ‘경비어천가’ 수준의 정감 어린 찬사다.

△프레데릭이 2003년 한국고속철도로부터 받은 감사패.
△프레데릭이 2003년 한국고속철도로부터 받은 감사패.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역마살 인생’

2년간의 서울살이를 마친 프레데릭에게는 이때부터 경희 씨의 표현대로 ‘역마살(驛馬煞) 인생’이 펼쳐진다. 영국 런던 근무의 군불을 지핀 ‘영불(英佛)해협 MTR 건설’을 시발점으로 타이완·불가리아·중국·알제리 고속철도 건설에 이르기까지 유랑의 생활이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시작한 것, 불가리아→중국 생활 중간에 울산 언양 생활이 반년 가까이(2009.12∽2010.5) 끼어든 것은 순전히 KTX 울산 구간 공사 때문이었다.

그런저런 이유로 프랑스 루앙에 사시는 프레데릭의 부모님(경희 씨의 시부모님)을 제때 찾아뵙는다는 건 언감생심, 꿈 같은 일이었다. “어쩌다 한 번 찾아뵈어도 1개월 남짓 머무는 게 고작이었죠. 변명 같지만, 프랑스 요리도 두 가지밖에 못 배웠어요.” 2남 2녀 중 맏이인 프레데릭도 직장 일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는 귀띔이다. 그러던 중 프레데릭이 55세 때인 2016년 12월, 그에게 퇴직 카드가 접이 비행기처럼 날아든다. 그러잖아도 일의 늪에서 빠져나오기를 갈망하던 ‘타고난 자유인’ 프레데릭에게 이 ‘해방구(解放區) 입장 티켓’은 최상의 선물이나 다름없었다. 부부는 몽돌해변을 끼고 있는 북구 산하동을 새 보금자리로 삼기로 뜻을 모았다. 프레데릭의 취향을 존중한 선택이기도 했다.

◇ “강동의 자연환경, 하나같이 매력적”

“처음엔 ‘뷰포인트(viewpoint)’가 제일 좋다는 108동을 골랐죠. 바로 앞이 탁 트인 바다여서 그야말로 뿅 갔죠. 그런데 웬일일까요? 계약 기간 2년이 지나니 집주인이 전세금을 2배로 올려 받겠다는 거예요.” 하는 수 없이 옮긴 곳이 지금의 108동의 꼭대기 층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유인 프레데릭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온 사방이 자신의 놀이마당이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산도 바다도 시원한 공기도, 어느 하나 맘에 들지 않는 게 없다. 고향 루앙보다 좋다고 했다. 다양한 취미 중에서도 ‘바다 수영’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작년 11월 16일 그 차가운 강동 앞바다에서 혼자 수영을 했대요. 그것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1km 바닷길을 말이죠.”

11월 중순이라면 늦가을∼초겨울 언저리다. 그런데도 프레데릭은 연신 싱글벙글한 표정이다. 바닷물 온도가 17도일 때까지는 수영을 즐길 수 있는데 그날은 20도쯤이어서 춥지 않았다는 것. 내친김에 짓궂은 질문을 하나 던졌다. 해마다 성탄절을 앞두고 부산 해운대 앞바다에서 벌어지는 ‘북극곰 수영대회’에 나갈 생각은 없느냐고. 돌아온 답은 절레절레 흔드는 고갯짓이었다. 이 대목에서 경희 씨가 그날(17일)의 일화 한 토막을 전한다. “웬 할아버지가 얼어 죽는 건 아닌지 싶어 깜짝 놀랐죠. 그런데 알고 보니 신랑인 거예요.”

이번엔 하루 일정이 어떤지 프레데릭 본인에게 물었다. “아침에 일어나 2시간 남짓 책을 읽죠. 런치(점심)가 끝난 오후엔 자전거 아니면 산을 타거나. 바닷가 산책을 즐기죠. 수시로 음악도 듣고….” 한국식으로 치자면, 한량도 이만한 백수 한량이 더 어디 있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돈은 생기면 쓰고, 없으면 없는 대로 살겠다’는 게 신랑의 생활철학이랍니다.” 경희 씨의 속앓이가 그래서 깊어지는지도 모른다.

◇ “새해엔 글로벌센터에서 한국어 수강”

그러나 새해엔 이들 부부의 생활습관이 조금씩은 달라질지 모른다. 프레데릭은 한국어 배우기에, 경희 씨는 사회 활동에 눈을 뜨기로 결심을 굳혔기 때문. “1월 중순부터 시청 글로벌센터에서 하는 한국어 배우기 강좌에 나갈 겁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프레데릭의 귀띔이다.

경희 씨도 활동 반경을 넓힐 참이다. 작년 여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땄어요. 어학원 일자리를 권하는 분도 있고요.“

경희 씨는 두 식구의 식사 준비를 저녁에만 한다. 그러나 언제나 퓨전식이다. 식성의 차이를 배려하기 때문이다. ‘신랑’의 아침과 점심 식사 준비는 프레데릭 혼자의 몫이라고 했다. 검은 토끼의 해에는 서로 오순도순 살아가는 토끼처럼 취미도 식성도 서로 닮아가길 속으로 빌면서 35층 엘리베이터에 몸을 맡겼다.

글= 김정주 논설실장/ 사진= 장태준 기자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