옻칠 스카프
옻칠 스카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12.2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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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편지 모음집’의 마무리 편집 작업이 한창인데 휴대전화에 문자가 꽂힌다. 바빠서 편지는 못 쓰고 ‘꿩 대신 닭’을 보내겠노라는 울산 K 회장의 문자다. 다음 날 도착한 소포는 가을빛 짙은 울산 바다 한 자락을 뚝 자른 듯 초록이 펼치는 향연, 현란한 옻칠의 실크 스카프였다.

어렸을 때 옻이 올라 얼굴까지 퉁퉁 부어오르던 생각이 나서 선뜻 만지지도 못하는 나. 금방이라도 옻 기운이 온몸으로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것 같은 착각도 잠시, 스카프 자락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서 본다. 어떤 옷과 코디해도 잘 어울릴 것 같은 귀한 선물이다.

대한불교조계종의 제일 큰 어른, 제15대 종정으로 봉직하고 계시는 성파 큰스님께서 손수 만드신 예술품이라고 했다. 우리 평신도들은 얼굴도 똑바로 쳐다볼 수 없는 그런 큰스님이 만드신,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작품, 그야말로 진품명품이 나하고 인연이 닿다니! 이건 분명 불연(佛緣)이었다.

K 회장은 세례명까지 가진 가톨릭 신자였으나 요즈음은 불교 쪽을 기웃거리기도 하며 성파 큰스님과는 가끔 대화를 나누는 사이라고 했다. 어쩌면 영호남 레일을 오가며 쌓은 도타운 정이 불연의 끈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는지….

옻칠한 실크 스카프와 자개 기법을 이용한 독특한 작품들을 제작하신다는 성파 큰스님. 그 스님께서 ‘나전(螺鈿) 옻칠’ 기법으로 만드셨다는 울산의 두 국보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의 수중전시가 양산 통도사 서운암 경내 장경각 앞마당의 인공연못 두 곳에서 일 년 넘게 이루어지고 있단다.

자개농의 진가는 휘황찬란한 자개 무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능적으로도 옻칠한 장롱 속이야말로 방충, 방습, 방부 효과가 뛰어난 내구성도 그렇다.

그런 이유였을 게다. 자개농에 갈무리한 비단 한복이나 모직 옷은 신기하게도 좀이 슬지 않았다. 이런 옻칠의 묘화(妙化)가 아니고서야 물속에서 그 많은 세월을 어찌 견디겠는가. 몇 천 년이나 바위와 한 몸이 되어 겨우 이름을 보존하고 있던 고래와 물고기들을 옻칠로 입혀 되살려서 세상 구경까지 시켜 주신 큰스님의 불은(佛恩)에 새삼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 기다란 옻칠 스카프로 온몸을 덮어본다. 마치 커다란 바윗덩이를 휘감는 보드라운 이끼인 양 나를 포근히 감싸주는 옻칠 스카프. 수행에 힘쓰는 승려의 옷을 일러 ‘이끼 옷’이라 한다던가. 햇볕도 들지 않는 깊은 산속에서 폭포수를 맞으며 옷에 이끼가 끼도록 수행하지 않으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의미란다. 스님들처럼 옷에 이끼가 얹도록 수행은 못 할지라도, 메마른 바위에 습도를 유지해 주어 지구를 살린다는 푸른 이끼처럼, 부족하지만 내가 쓴 문장들이 누군가의 상처 난 가슴을 어루만질 수만 있다면….

이끼의 꽃말은 ‘모성애’, 걸핏하면 성깔 부리는 철부지 아이를 어루만지듯 이끼의 습한 기운은 독의 열기조차도 능히 다스린다고 한다. 평화스러운 성품을 지닌 이는 상대를 향해 결코 열기를 발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뜨거운 열기를 품은 내 마음에 스스로 놀랄 때가 많다. 그렇다면 불쑥불쑥 치솟는 이 더운 기를 다스리는 마음공부가 우선이리라.

몇 번이고 꺼내 뺨에 대어 보는 스카프에서는 서늘한 이끼 향도 풍긴다. 옻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아니 옻의 효과는 나를 깨우치는 죽비다. 글을 쓰는 내 등을 후려치는 귀하고 귀한 덕담 하나 건진 셈이랄까.

‘비단보다 더 소중한 인연들이 좀 슬어 구멍 나지 않도록 네 마음에 옻칠을 게을리하지 말라’, 스카프에 감춰진 큰스님의 법어(法語)를 이제야 비로소 터득한다.

이정선 (사)영호남수필문학협회 상임이사, 광주여류수필회장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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