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그리움만 쌓이네
[이기철 작가의 ‘책 한 권 드실래요?’]…그리움만 쌓이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9.05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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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이미경 -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그리는 행위는 그리워하는 일 연장선에 있다. 간곡한 마음이 배어있다는 말이다. 동사(그리다, 움직씨)와 형용사(그립다, 그림씨)가 만나서 안타까움은 더욱 짙어진다. 화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그리움 근거를 남기기 위해 그린다. 거기다 마음에 맞는 문장이라도 남긴다면 더 좋다. 글은 그림이나 진배없다더니 딱 맞는 말이다.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 종이에 아크릴 잉크와 펜으로만 이미경 씨가 쓰고 그렸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저쪽으로 걸어 들어가게 한다. 저쪽은 다름 아닌 유년, 추억, 고향, 스러짐, 아쉬움… 등 그 시간과 맞물려 있는 시공간이다. 그런 곳을 찾아가는 타임머신이다.

2017년 2월, 특별판으로 펴냈다. 먼저 나온 일반판 그림 중 글 일부와 출간 이후 완성된 신작 14점을 더해 새로운 판형과 편집으로 재탄생시켰다. 펜화는 특성상 작업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으며 강도 높은 집중력, 노동력을 요구한다. ‘시간을 저당 잡힌 일상’이 만들어 낸 작품이다. 너무 자세한 묘사는 사진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지나치지 못하고 담아온 하나하나에는 따뜻한 시선이 그대로 남아있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구멍가게 이야기, 먼저 지붕부터 보인다. 양철지붕, 함석지붕, 도단 지붕, 슬레이트 지붕 등 뭐라 불러도 상관없는 풍경이 떡 하니 나타난다. 빨간 우체통과 ‘담배’도 나란히 붙어있다.

작가는 왜 뒤로 나앉은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을까? 1997년 여름, 이런저런 사정이 생겨 경기도 퇴촌 관음리에 정착하게 된다. 거기서 시작된 ‘구멍가게와 인연’은 20년이 훨씬 넘어선 지금까지 방방곡곡을 찾아간다. ‘가게’라는 말보다 ‘점빵’이 더 다가오게 만드는 소환(召喚).

도로포스 사탕이나 아스팔트가 녹는지 입에 문 아이스께끼가 녹는지 아랑곳하지 않은 그곳은 이제 슈퍼, 마트로 발전했다.

이제 지는 해 따라 길게 그림자에 누워 있는 동네 구멍가게. ‘쥐구멍에 볕들 날’은 고사하고 하나둘씩 사라져 가는 놀이터를 따라가는 시선은 섬세하고 구들장 아랫목처럼 따뜻하다.

글과 그림 속에 숨겨놓은 장치는 ‘아, 옛날이여’가 아니라 자연스레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찍어내게 한다. 마을 구멍가게 완성은 평상(平床)이 있어야 한다. 좌판도 되고 쉼터도 되는, 가끔 술판 역할도 하는. 아침저녁으로 봐도 동네 사람 안부를 또 묻고 길손에겐 다정히 ‘어데서 왔수?’라 건네는 맑은 물음표를 가진 자리. 평상은 평상시를 염려하는 갈증이 남은 이들에게 목마름을 잠시 견디게 하는 장소인 셈이다.

또 하나 빼 먹으면 안 되는 배경. 구멍가게 오른편이든 왼편이든 ‘반드시’ 있어야 할 나무 한 그루. 아니 없다면 ‘고무 다라이’(-대야)에 담긴 꽃밭이라도 꼭 있어야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완성하려면 말이다. 작가는 매번 나무 이름을 선명하게 밝히지는 않는다. 읽고 보는 이는 ‘아, 저 나무’라고 단박에 알아차린다.

작가는 한 시대를 함께 살았던 소박한 존재들과 눈빛을 나눌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만 한다. 시간만큼 마모되고 둥글어진 모서리가 주는 ‘울컥’이다.

그녀 그림을 ‘가장 한국적’이라고 하면 틀렸다. ‘우리 동네’(한국)를 그렸지만 ‘남의 동네’(세계) 사람도 동일 감정을 느낀다. 어느 외국인이 남겼다는 한마디. ‘한국 문화는 잘 모르지만 느낄 수 있어, 음악처럼…’. 그렇다.

2020년 또 한 권 책이 나왔다. ‘구멍가게, 오늘도 문 열었습니다’. 뒤돌아보니 문 닫은 가게가 대부분이지만 그리움은 멈추지 못한다. 그림은 여전히 힘이 세고 추억은 더 강한 향기를 가지고 있다. 지난 5월에는 한 갤러리에서 ‘특별전’을 가졌다. 공개하지 않았거나 아까워서 혼자만 간직하고 싶었던 그림들을 내놓았다. 물론 한 점도 판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소장품인 셈이다. 이제 돋보기가 필요해질 나이인 작가는 여전히 어느 길을 걸을 테고 우리는 언젠가 ‘구멍가게’를 다시 만날 수 있으니 행복하다고 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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