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큐어’-불만, 불안, 공허라는 꼭짓점으로 이뤄진 삼각형(삶)
영화 ‘큐어’-불만, 불안, 공허라는 꼭짓점으로 이뤄진 삼각형(삶)
  • 이상길
  • 승인 2022.08.18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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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큐어' 한 장면.
영화 '큐어' 한 장면.

영화는 병원에서 환자로 보이는 한 여자가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면서 시작된다. “옛날 어느 숲속에 한 남자와 예쁜 딸이 살았다. 어느 날 황금마차가 집 앞에 서더니 늠름한 귀족이 내렸다. 귀족은 딸을 아내로 달라고 남자에게 부탁했다. 남자는 기뻐하며 결혼을 승낙했다. 사위가 될 귀족은 파란 수염이 있다는 것만 빼면 흠잡을 게 없는 사내였다.” 여기까지만 읽고 여자는 책을 탁자 위에 내려놓는데 그 책의 제목은 <푸른 수염>이었다. 잠시 뒤 그녀는 의사에게 읽던 책의 뒷이야기를 안다면서 이렇게 말한다. “딸은 푸른 수염을 죽여 버리죠.”

좋은 데 시집 간 딸이 왜 남편을 죽여 버리는 지는 조금 있다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는 이처럼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아니 이런 급작스런 분위기 전환은 이후 계속되는데 그것은 마치 ‘잔혹 동화’를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회사원, 교사, 경찰, 의사 등 평소 아무 문제가 없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한 살인이 자꾸만 일어났던 것. 동화책에서 평범한 회사원이나 교사, 경찰, 의사가 살인자로 등장하진 않잖아. 허나 이 영화에선 그들이 살인을 저지른다. 아주 잔혹하게. 또 어이없게.

그랬다. 살인을 저지르는 방식과 대상이 문제였는데 그들은 창녀를 비롯해 아내와 동료, 혹은 자신의 환자를 일상적으로 대하다가 갑자기 돌변해 죽여 버린다. 또 죽인 후에는 다들 공통적으로 피해자의 몸에 칼로 길게 ‘X’자를 만들었다. 이에 주인공 타카베(아쿠쇼 코지) 형사는 수사에 나서게 되고 수사를 통해 그들이 모두 한 남자를 만나고 난 후 범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 남자’는 대체 뭘까?

<링>이나 <주온> 등을 통해 일본 공포영화의 명성은 익히 잘 알고 있었지만 <큐어>는 지금껏 내가 봐온 공포영화 가운데 가장 독특하다. 귀신이나 좀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보는 이를 놀래키거나 짜더러 잔인한 장면도 많지 않다. 하지만 범인을 잡으려는 타카베 형사를 계속 따라가다 보면 어느 새 나의 내면 깊숙이 잠재해 있는 불만과 불안, 공허가 낱낱이 까발려진다.

특히 불안이라는 감정이 가장 심했는데 평온한 일상에서 갑자기 휘몰아치는 신경질과 폭력은 아주 현실적인 공포로서 그 촉이 어마어마하게 날카롭다. 그런 일은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타인의 신경질적인 말과 행동, 교통사고, 혹은 갑자기 나를 향하는 주먹이나 돌멩이, 칼, 쇠파이프 등등. 영화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걸 상상하게 만들어서 점점 무서워진다. 거기다 처음 등장할 때 순한 양과 같았던 타카베 형사가 범인을 쫓는 과정에서 자신의 불만과 불안, 공허가 드러나면서 점점 신경질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공포스럽다. 해서 사건이 마무리되고 타카베는 순한 양의 모습으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지만 거기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포감에 숨이 막히더라. 바로 일상이 주는 공포랄까. 참고로 이 영화는 봉준호 감독이 깊은 애정을 표시해 화제가 된 작품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우린 모두 남들 앞에서 쉽게 웃음과 여유를 부리지만 그건 일상에서 보여 지는 껍데기 같은 것일 뿐,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혼자일 때 대면하게 되는 마음 속 깊은 불만과 불안, 공허가 아닐까. 실상은 욕심이나 욕망(욕구)이 채워지지 않거나 지금 자신을 괴롭히는 문제 때문에 ‘불만’스럽고,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상처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불안’하다. 또 겪을까봐. 그렇다고 아무 일이 없으면 이젠 없어서 ‘공허’하다. 사랑에 빠지면 된다고요? 허나 가만히 있질 못하는 사랑은 너무 좋아서 변할까봐 점점 불안해진다. 또 만날수록 불만도 쌓여가고, 함께 있지 않을 땐 공허하다.

결국 우리는 불만, 불안, 공허라는 꼭짓점으로 이뤄진 삼각형의 삶을 늘 힘겹게 짊어진 채, 지금 그 삼각형의 무게중심에 서 있다고 스스로 착각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는지. 허나 영화 속 ‘그 남자’는 그게 착각이라는 걸 잘 알았고, 그들이 스스로 무너지도록 살짝 밀어줬던 거다. 영화 <다크 나이트>에서도 조커(히스 레저)는 배트맨(크리스찬 베일)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광기라는 건 중력(重力)과 같아서 살짝만 밀어줘도 끝없이 떨어져.”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서 자막이 오르자 영화는 내게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 했다. “이 영화 추천하지마! 정신 건강에 해로워.” 하긴, 모르는 게 약이지.

그래도 프랑스 동화작가인 ‘샤를 페로’의 잔혹 동화 <푸른 수염>에서 딸이 남편인 푸른 수염을 죽인 이유는 알려드릴게요. 이미 6번이나 결혼을 했던 푸른 수염의 귀족은 7번째 아내로 맞이한 숲속 남자의 딸에게 성의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주며 “모든 방을 다 열어도 좋지만, 지하실 구석의 한 작은 방만은 열지 마라”고 했다. 하지만 결국 그 방을 열게 되고, 거기엔 지금까지 푸른 수염과 결혼한 아내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들은 남편인 푸른 수염의 명령을 어기고 문을 열었다가 들켜서 살해된 셈. 해서 숲속 남자의 딸은 성을 찾은 친오빠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푸른 수염을 죽여 버리게 된다. 헌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다. 첫 번째 부인은 왜 죽인 거지?! 왠지 으스스하죠? 늘 그렇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그 바닥을 알기가 참 어렵다. 2022년 7월 6일 개봉. 러닝타임 111분. 이상길 취재1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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