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할수록 나이는 격(格)을 갖춘다
겸손할수록 나이는 격(格)을 갖춘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7.31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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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처음 만난 사람에게 “무슨 띠세요?” 혹은 “몇 년생이세요?”라고 물으면 대단한 실례라 생각했다. 특히 여성에겐 더욱 그랬다. 하지만 요즘 이 질문은 별로 생소한 질문이 아니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도 어렵지 않게 이 질문을 서로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외국인에게는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나이에 관한 질문이 우리에겐 왜 큰 무리 없이 받아들여지는 걸까? 나이를 묻거나 대답하는 사람 사이에 특별한 어색함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나이에 대한 정보가 상호 간의 의사소통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 편한 대화가 오고 가려면 나이부터 알아야 한다. 나이에 따른 서열이 정해져야, 혹여 상대방에게 무례함을 범하지 않고 원활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게 된다. 예의를 중시하는 우리 문화 속에서 나이에 대한 질문은 개인 정보를 침해하는 무례한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빠르게 안착시키는 요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요즘도 “몇 년생인지요?”라고 서슴지 않고 묻는 질문을 가끔 듣는다. 과거엔 그런 질문을 받으면 주저 없이 몇 년생이며 심지어 무슨 띠인지도 상대방에게 친절하게 알려줬다. 하지만 이젠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나이가 많이 들었다는 생각에 혹시 내 나이가 상대방에게 ‘격(格)’이 아니라, ‘벽(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선(善)한 사람은 선한 마음의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는다”는 말씀은 오늘 큰 묵상 거리로 다가온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남을 비판하는 것을 좋아한다. 필자는 뒷담화를 즐겨 하는 사람들을 특히 멀리한다. 타인의 잘못을 지적함으로써 얻는 자기만족과 뿌듯함 때문인지는 몰라도, 의기양양하게 상대방의 단점을 고쳐 주겠노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비판적인 시선을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돌리자. 남을 지적할 때 들이대는 엄격한 잣대로 먼저 자기 자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돌아보니 주위 사람에게 “진솔해야 한다, 성실해야 한다, 겸손해야 한다, 공동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과할 정도로 요구한다. 지금도 그들의 잘못이나 단점이 보일 때면 어김없이 지적하곤 한다. 그런데 그런 기준이나 잣대가 나에게도 엄격하게 적용되고 있는지 생각하면, 부끄럽게도 나 자신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하였음을 깨닫는다. 참으로 누군가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스스로 ‘본(本)’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상대방의 눈 속에 박힌 티를 빼내 주겠다고 신나게 소매를 걷어붙이기보다, 자기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빼내려는 노력을 상대방에게 보여주는 것이 훨씬 마음에 와닿을 것이다.

나이가 드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도 그 나이듦의 과정이 그리 유쾌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삶에서 길어 낸 지혜에 기대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억, 친밀, 쇠약, 감사, 수용의 과정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마저도 나에게 맞게 받아들이는 것이 나이가 들면서 얻게 되는 연륜이다. 그동안의 다양한 경험들이 축적되면서 조금 더 품격 있는 노화의 과정을 맞이하게 된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그 시간을 더욱 자신에게 충실하게 쓸 수 있다는 생각의 반전은, 단지 노년층만이 아닌 스스로에게 아직 많은 시간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세대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결국 ‘잘 늙는다’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 감정반응을 덜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삶의 질을 높이는 지름길이다. 나이가 벽이 되면 외로워진다. 두터운 벽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은 드물다. 반대로 나이가 격이 되면 행복해진다. 하나라도 지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오만함이 높아질수록 나이는 벽이 되고, 겸손함이 묻어날수록 나이는 격을 갖춘다. 나는 과연 내 나이의 숫자만큼 품격의 무게를 갖추고 있는 걸까? “몇 년생이세요?”라는 질문에 ‘벽이 아닌 격’으로 답할 수 있도록 오늘도 겸손하게 살아야겠다.

이동구 본보 독자위원장·RUPI사업단장,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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