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교사
자발적 교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7.04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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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교육청은 지난달 사흘(6.29~7.1)에 걸쳐 ‘전·학·공 토크 콘서트’를 개최했다. ‘전·학·공’이란 ‘전문적 학습공동체’의 줄인 말로, 필자가 생각하기에 교사들의 전문성을 키우고 학습 방법을 연구하는 민주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 같다. 울산의 모든 초·중·고에는 이런 좋은 취지를 받드는 ‘전문적 학습공동체’라는 교사 모임이 있다. 그러나 ‘전·학·공’이 울산에서 정책적으로 시행되면서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온 키워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자발성’이다. 이번 행사에서도 강연자들은 끊임없이 교사의 ‘자발성’을 유도한 성공 사례를 이야기했고, 참관자들은 끊임없이 교사의 ‘자발성’을 끌어낼 방법이 무엇인지를 질문했다. 하지만 필자는 양측 모두 ‘자발성’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발성’의 글 뜻을 살펴보면 스스로 ‘자(自)’에 피어날 ‘발(發)’이다. 이를 우리 말로 풀어보면 ‘스스로 피어난다’ 또는 ‘스스로 일어난다’쯤이 되겠다. 그런데 이 ‘자발성’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재미있다. 우리가 어디에 힘주어 읽느냐에 따라 ‘자발성’이라는 단어가 실제로 지니는 뜻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발’ 자에 힘을 주어 해석하면 스스로라는 뜻은 소극적으로 변하여 마치 ‘자발성’이 누군가가 도와주거나, 이끌어 주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러나 ‘자’ 자에 힘을 주어 해석하면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된다. 즉, ‘피어나거나’, ‘일어나는 것’은 스스로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자, 이 단어에서 우리가 힘주어 읽어야 할 것은 어느 글자인가? ‘자’ 자인가. ‘발’ 자인가?

만약에 ‘발’ 자에 힘을 주어 읽는다면 사실상 ‘자’ 자를 앞에 붙일 이유가 없다. 내가 일어나든, 남이 일으키든 그 모두를 ‘피어난다’, ‘일어난다’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 자에 힘주어 읽을 때는 어떨 때인가? 그것은 ‘피어나다’, ‘일어나다’에 어떤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즉 그냥, 아무렇게나, 다양한 방법으로 ‘피어나다’, ‘일어나다’의 뜻이 아니라 특별히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어떤 방법이 동원되거나, 어떠한 이익을 동원하여 피어나거나 일어나는 것을 ‘자발성’이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살펴본바 ‘자발성’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문제이다. 자기만이 오로지 피어나거나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이다.

이렇게 ‘자발성’이라는 뜻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글의 서두에서 말했던 양측 모두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인다. 처음부터 ‘자발성’은 유도될 문제도 아니고, 끌어낼 문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하여 두 손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필자는 이 문제를 다른 각도로 접근하고 싶다. 교육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교사로서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다면, 그는 분명히 자발적으로 교육하는 방법을 연구하게 될 것이다. 교사가 교사일 수 있는 이유는 그 힘든 교육을 사랑하는 마음에 있다. 우리가 힘든 일을 반복하는 이유는 쉬운 길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힘든 길과 친해지기 위해서이다. ‘교육이 무엇인가?’라는, 거대하면서도 답도 없는, 이 힘든 질문을 끝없이 스스로 연구하면, 어느새 교육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어느새 교육과 친해질 것이고, 어느새 자발적으로 방법을 연구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핍은 충만의 선결 조건이다. 교사들은 ‘교육이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얼마나 해 왔는가 반성하고,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고, 교육청은 이 어려운 일을 하는 교사들을 응원하는 정책을 펼쳐야 할 것이다.

심문규 다전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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