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오랑 중령과 백영옥 여사
김오랑 중령과 백영옥 여사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6.20 22:59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5월 24일, 눈이 번쩍 뜨이는 기사 하나가 시야에 잡혔다. 대통령 소속 ‘군(軍)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가 51차 정기회의 끝에 12·12 반란군에 의해 사살된 김오랑 중령(당시 소령) 사건에 대한 직권조사에 나서기로 했다는 소식이었다. 직권조사 이유는 “사망 직후 작성된 군 기록에는 사망 구분이 ‘순직’으로 돼 있고, 국가기관에 의한 조사를 통해 구체적인 경위가 기록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 중령은 12·12 신군부 쿠데타 당시 정병주 특전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다. 그는 정 사령관을 체포하러 들이닥친 신군부 제3공수여단 병력에 맞서 총격전을 벌이다 총탄에 맞아 숨졌다. 사망날짜는 1979년 12월 13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의 희생 경위는 반란군 재판 과정에서 확인됐고, ‘참 군인’ ‘억울한 죽음’ ‘김오랑 정신’이란 수식어가 그래서 따라다닌다. 그는 부인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1990년 중령으로 특진된 데 이어 2014년에는 국회의 노력으로 보국훈장이 추서된다. 묘비는 국립서울현충원 제29 묘역에서 만날 수 있다.

‘김오랑’이란 이름 석 자를 또렷이 기억하게 된 것은 부산 국제신문 선배 기자인 조돈만 소설가(2017년 1월 작고, 대표작=<해뜰날> ) 덕분이었다. 서울 테헤란로 잡지사에서 같이 근무하던 1987년 6월 어느 날, 조 선배는 소설 초고(草稿) 한 움큼을 건네며 소감을 물었다. ‘김오랑 소령’에 관한 논픽션(nonfiction). 발로 뛰며 쓴 것으로 보이는 습작원고에는 김 소령 4년 연하의 부인 백영옥(白榮玉) 여사(1991년 6월 작고)에 관한 서술도 들어있었다.

일터를 부산 CBS로 옮긴 뒤 관심은 김 소령보다 백 여사에게 쏠리기 시작했다. 거처가 부산 영도의 산중 암자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후배 기자를 시켜 근황을 알아보게 했고, 들려온 소식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남편의 충격적 사망 소식이 시력을 잃게 했고, 영도 생활도 측은하기 짝이 없어 보이더라는 것.

그런 뒤 그녀의 소식은 오랫동안 기억의 곳간에는 없었다. 햇수로 따져 자그마치 30여 년 전의 일이어서 그런가? 그러던 그녀의 소식을 다시 들을 기회가 생겼다. ‘군 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의 직권조사 뉴스가 바로 그 기회였다. 하지만 인터넷 바다에서 다시 건져낸 백 여사의 뒷얘기는 더한층 비탄(悲嘆)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고 만다. ‘위키백과’의 설명을 잠시 들어보자.

“김오랑 중령의 시각장애인 부인 故 백영옥 여사(1948.11.27~1991.6.28)는 1990년 12월 당시 대통령 노태우를 비롯해 전두환, 최세창, 박종규 등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진행하다가 1991년 6월 28일 부산 영도의 자택 3층 건물 난간에서 실족사했다.”

정말 ‘단순 실족사(失足死)’였을까? 이 물음에 물음표를 던지는 사람은 오히려 자살(自殺) 쪽에 무게를 둔다. 생(生)의 끝자락에서 그녀는 얼마나 처절한 고독감(孤獨感)으로 몸부림쳤을까? 듣기로는, 돕는 이보다 기생하는 이가 더 많았다는 주장도 있다. 위키백과 기자는 그녀에게 ‘백수린’이라는 가명으로 펴낸 자서전(自敍傳)이 남아 있다고 귀띔한다. 그 속에는 알려진 것보다 얼마나 더 많은 비화(?話)가 숨어있을까?

경남 김해가 고향인 김오랑 중령은 육사 25기생이 되기 전 김해농고를 다녔다. 2014년 현충일에 그의 흉상이 김해시 삼정동 김해삼성초~삼정중학교 사이 산책로 옆 잔디밭에 세워진 것도 바로 그런 배경이 작용했다. ‘위원회의 직권조사’가 김오랑-백영옥 부부의 원(怨)과 한(恨)을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계기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김정주 논설실장>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