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친다는 것
가르친다는 것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6.14 23: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달 스승의 날을 맞아 제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에 자신이 이만큼 성장했다며 감사의 뜻을 내게 전했다. 오랜만에 제자의 근황을 들으니 기분이 좋았고, 나의 노고를 알아주는 것 같아 더 대견스러웠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제자의 이 말이 나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다. 문득 ‘내가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일까?’ 하는 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도대체 그에게 무엇을 가르쳤단 말인가? 만약, 교과서나 진도대로, 또는 다른 선생님들이 하는 만큼 어떤 내용을 가르쳤다고 치면 제자는 나를 떠올리며 특별히 연락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선생님의 가르침’이라고 못 박아 말했었다. 나는 도대체 제자에게 무엇을 가르쳤단 말인가? 자연스레 이 질문은 교사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선 나는 어떤 특정한 ‘내용’을 떠올려 보았다. 인생에 남을 좋은 말을 해주었거나, 다른 선생님은 모르는 특별한 공식을 가르쳤거나. 학생이 모르는 그 무엇인가를 가르쳤거나, 그것도 아니면 어려워하는 부분을 쉽게 잘 설명했거나…. 그런데 그 어떤 것도 만족스러운 답이 되지 못했다. 그제야 나는 이 질문에 대한 접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교사들은 학교에서 매일 교과 지식을 가르친다. 그런데 교과 지식을 가르친다는 것은 아무리 잘 가르쳐도 내가 이해하고 있는 것을 똑같이 학생들의 머릿속에 옮겨 놓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전의 나처럼, 사람들은 이것이 가능한 일인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가는 아는 것을 실천하고 있는지, 아는 것을 표현하고 있는지, 아는 것을 잘 맞히고 있는지를 따져보는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실천하면 아는 것이고, 표현하면 아는 것이고, 정답을 맞히면 아는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우리의 삶은 정답을 맞히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표현을 잘한다 하더라도 제대로 알고 있는지는 의문이며, 실천한다 하더라도 그 무엇을 다 알았다고 말할 수 없음을 늘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교사의 가르치는 행위를 설명하기에는 교과 지식을 가르친다는 말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제자의 연락을 받기 전과 받은 후,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물론 나의 일상과 학교생활에 변화는 없다. 그러나 전화 한 통이 유발한 심각한 질문 때문에 나는 그 이전과는 다른 존재, 즉 교사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고민하는 존재가 되었다. 제자로부터 중요한 가르침을 얻은 셈이다. 아마도 필자의 가르침이 고맙다고 말한 제자 또한 오늘의 나와 같은 존재 차원의 변화를 경험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한 ‘무지의 자각’은 교과 지식적 측면에서 자기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자각하라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뜻이다. 이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겸손과 앎에 대한 추구를 동시 담은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런 의미로 존재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결코 서로 다르지 않다. 존재 차원에서 ‘가르치는 것’과 ‘배우는 것’은 공부한다는 같은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교실에서 학생과 교사는 겉으로 다른 일을 하지만 사실은 같은 일을 하는 것이다. 교사가 매일 교실에서 교과 지식을 가르치는 것은 학생들 머릿속에 교과 지식을 구겨 넣기 위함이 아니라 학생들이 껍질을 벗는 것을 목격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비로소 교사인 나도 껍질을 벗는 것이다. 오늘 나를 가르쳐준 제자에게 이 글을 통해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

심문규 다전초등학교 교사


인기기사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