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시계
대통령 시계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6.12 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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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이 한 달쯤 지난 시점, 울산의 한 중고가게에서 뜻밖의 물건이 시야에 들어왔다. 두 마리 봉황 문양 아래 무궁화 문양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첫눈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꼼꼼히 살펴보니 여성용 손목시계였다. 지름이 3cm도 안 되는 둥근 시계 바닥 아래쪽에는 가녀려 보이는 글씨 석 자가 또렷이 적혀 있었다. ‘박 근 혜’라고…….

문득 지난해 가을, 양산 통도사 서운암 토굴의 일이 스파크처럼 떠올랐다. ‘서운암 토굴’이라면 지난 3월 대한불교조계종 제15대 종정 자리에 오른 통도사 방장 성파스님의 손님 접견실이다. 이날은 마침 울산시의회 L의원이 울산대 K교수의 소개로 성파스님을 알현하던 날이었고, 필자도 일행에 섞여 있었다. 큰절을 마친 L의원의 눈이 갑자기 휘둥그레졌다. 스님이 손목에 찬 대통령 시계 때문이었다. 스님은 K교수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당시 여당 소속 L의원을 의식해 일부러 ‘문재인 시계’를 차고 있었던 것.

그 뒤 몇 달이 지난 올해 초, 부산 광안동에서 고깃집(‘장모손 족발’)을 경영하는 초등학교 동기회장이 사진 넉 장과 간추린 메모 두 장을 카톡으로 보내 왔다. 알고 보니 그는 대통령 시계 수집광(컬렉터)이었다. 메모 일부를 인용해 보자. “1~3대 이승만 대통령, 4대 윤보선 대통령, 5~8대 박정희 대통령 때까지는 대통령 시계를 만들지 않았음. 그러다가 9대 박정희 대통령 취임식 때 처음 대통령 시계를 만들었음.”

친구(장기수 사장)는 대통령 시계가 처음 만들어진 날짜를 1978년 12월 28일이라고 귀띔했다. 그러나 그 대(代)는 10대 최규하 대통령 때에 잠시 끊기고 만다. 대통령 시계가 다시 빛을 본 것은 전두환 대통령 집권 시기(11~12대)였고, 그 뒤로는 계속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노태우(13대), 김영삼(14대), 김대중(15대), 노무현(16대), 이명박(17대), 박근혜(18대), 문재인(19대) 대통령 할 것 없이 역대에 걸쳐 모두 선물용 시계를 만들었다는 얘기다.

친구는 대통령 시계의 쓰임새에 대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통령 시계 중 휘장(봉황)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것은 대통령상 수상 때 상품으로 받은 것임. 대통령 시계는 취임식 때 만든 것도 있고 상을 줄 때 만든 것도 있으나 시계 모양이 다름.” 친구가 대통령 9인의 시계를 ‘취미로 하나씩’ 모으기 시작한 것은 10년 전. 그러다 보니 어느덧 세 세트나 모으게 됐다고 했다. 친구의 다음 말은 맛깔스러운 양념이나 다름없었다. “대통령 시계를 받는 사람은 ①구청장 이상 당선자 ②청와대(지금은 대통령실) 초청 방문자 ③특별한 행사 초청 대상자.”

그렇다면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의 시계는? 물론 빠뜨릴 리가 없다. ‘취임 후 기념품 1호’로도 불리는 ‘윤석열 대통령 기념 시계’는 5월 10일 취임식에 참석한 ‘국민희망대표’ 20인이 보름 뒤(5월 25일)에 선물로 받았다. 시계 앞면에는 ‘대통령 윤석열’이라는 서명과 봉황 무늬가, 뒷면에는 대통령 취임식부터 슬로건으로 써온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가 새겨졌다.

뒷면에 ‘사람이 먼저다’라는 글귀가 새겨진 문재인 전 대통령의 시계(2017년 6월 제작)는 재임 중 ‘이니시계’ ‘이니굿즈’로 불리며 인기 가도를 달린 바 있다. 머지않아 ‘윤석열 시계’의 값어치도 천정부지로 치솟을지 어떨지는 아직 장담하기는 이르다. 하지만 ‘국민희망대표’ 20인이 선물 받은 ‘한정판 윤석열 시계’만큼은 대통령 시계 컬렉터들에게 ‘부르는 게 값’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필자가 우연히 손에 넣은 ‘박근혜 시계’는 탐내는 지인들이 더러 생겨나고는 있다. 그러나 실은 아주 싼 값에 산 것이어서 언짢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대통령 시계’도 주인의 명운에 따라 달라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다.

김정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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