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화암(落花巖)
낙화암(落花巖)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5.22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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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이 울산에도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분은 많지 않을 것 같다. 인터넷에서 ‘낙화암’을 검색하면 ‘부여 부소산 낙화암’ 자료가 대부분이다. 검색 자료에서 한참을 내려가 보니 ‘미포만 백사장 서편 해송림이 우거진 곳에 바위석대가 우뚝 솟아 동해를 품은 듯한 기암절경에 있었다.’는 자료가 뜬다.

낙화암은 동구에 현대조선소가 들어서기 전 미포만 백사장 한가운데 솟아 있었던 바위로, 1970년대 초까지 지역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했다. 특히 바위 표면에 동구의 아름다운 자연경관을 노래한 한시(漢詩)가 새겨져 있는 탓에 향토문화재의 가치가 높아 관심이 더 갔다.

낙화암 주변 미포만에 현대조선소가 세워질 무렵 바위의 가치를 알아본 고(故) 김영주 한국프랜지 회장이 낙화암 쌍바위를 자신의 저택 정원으로 옮겨다 보관했다. 또 쌍바위를 받치고 있던 암각석은 현대중공업 내 영빈관 뜰 앞으로 옮겨져 보존됐다.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던 낙화암은 주민들과 멀어지게 되면서 기억에서도 사라지는 듯했다.

낙화암은 화전놀이 터이기도 했고, 초등학생들의 봄·가을 소풍 명소이기도 했다. 주민들의 삶과 애환이 서린 곳을 주민들의 품으로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동구민과 관심 있는 여러 향토 사가들의 의견이 모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2017년, 낙화암은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47년 만에 돌아온 낙화암 앞에 서서 잠시 눈을 감았다. 해안과 숲의 바위는 일시에 헐리고 사라졌지만, 낙화암 석벽에 새겨진 몇 줄의 암각 시는 그때를 전하는 듯했다. 자연스레 그 무렵의 사연들이 떠올랐다.

고을 수령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날마다 관기(官妓)들을 데리고 낙화암에서 유락(遊樂)을 일삼으니 지방민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져 갔다. 이에 어린 기생이 고을 수령의 가렴주구(苛斂誅求)에 맞서 붉은 치마를 뒤집어쓴 채 바다에 뛰어들어 수중고혼(水中孤魂)이 되었다. 며칠 후 어린 기생의 붉은 치마폭이 파도에 실려 떠돌다가 미포 앞바다 바위섬에 걸리니 이 바위를 ‘홍상도(紅裳島)’라 불렀고, 녹라채(綠羅彩)의 소맷자락이 파도에 밀려 나온 포구를 ‘녹수금의(綠袖錦衣)’라 불렀다는 설화가 지금까지 전해져온다.

낙화암이 시민들의 품으로 돌아온 지 5년이 되어 가지만 낙화암 안내 표지판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2017년에 왔다는데, 그동안 왜 만나지 못했을까? 해마다 상사화, 맥문동이 피었을 때도, 머위꽃이 꽃대를 올렸을 때도, 벚꽃이 질 때도, 비가 왔을 때도, 출렁다리가 생기고도 몇 번이나 왔었는데 왜 보지 못했을까?

벤치에 앉아 낙화암 주변을 바라보며 ‘왜’라는 질문의 답을 찾아본다. 낙화암은 대왕암공원 입구에 자리하고 있다. 주차장에서는 소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관광객 대부분은 낙화암 옆 사잇길로 지나가면서 대왕암이나 출렁다리로 향한다.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던 곳에서 이곳으로 와 있는 낙화암을 보니 슬퍼 보인다. 낙화암 바로 앞으로 보이는 시멘트 바닥이 금을 그어 놓은 듯 바짝 붙어 있으니 얼마나 답답할까. 길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낙화암이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좀 더 넓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그 옛터는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좀 더 비슷한 여건은 충분히 가꾸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낙화암이 사람들의 편의성에 떠밀리고 만 것은 아닌지…

어느 외국인 부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낙화암 앞에서 한참 머물다 갔다. 외국인 부부는 무엇을 가져갔을까 생각해 본다. 그 무엇은 관심을 가지는 순간부터 싹이 트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잊혔던 소중한 낙화암이 여러 사람의 힘으로 다시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으니 홍보를 아끼지 말아야겠다. 다음에 올 때는 월봉사거리 간판에 낙화암이, 대왕암공원 내 커다란 관광 안내판에도 ‘낙·화·암’ 이름 석 자가 들어가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花落昔何年(화락석하년=꽃은 옛날 어느 해에 졌다가)/ 東風吹又發(동풍취우발=봄바람이 불면 다시 피어나는가?)/ 岩春不見人(암춘불견인=봄은 와도 그 사람 보이지 않고)/ 空佇滄溟月(공저창명월=푸른 하늘 달빛만 덧없이 서성거리네.) *원유영 감목관(監牧官).

김뱅상 시인, 현대중공업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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