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유번호 / 박일례
고유번호 / 박일례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5.05 2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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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발 치수

이 숫자 위에 서서

신발끈 조이고 앞만 보고 간 길

이젠 헐렁해진 문수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번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태어나면서 바꿀 수도 없고 낙인처럼 따라다니는 주민등록번호, 대학교 학번, 군번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박일례 작가는 이제는 더 이상 자라지 않는 자기 발 치수에 정해진 신발 사이즈의 고유번호에 대해 생각합니다.

사진을 보면 박일례 작가와 함께 한동안 같은 여정을 보낸 세월의 흔적이 묻은 신발이 하루의 고단한 일상을 보내고 입을 벌린 듯 피곤해 보입니다.

작가는 변하지 않는 신발 치수라는 숫자 위에서 신발끈 조이고 앞만 보고 걸어왔다고 회상합니다.

아무리 신발끈 조이고 걸어온 세월이지만 이제는 신발도 헐렁해지고 아마도 자기 삶도 조금은 헐렁해지는 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젊었을 때는 모든 것이 딱딱 아귀에 들어맞아야 만족할 수 있고 거기에 성취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조금은 안 맞아도, 조금은 늦어도, 조금은 여유가 있는 삶도 괜찮다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가끔 자신을 너무 옭아매며 가혹하게 학대합니다.

남들과 비교하며 다른 사람에 비해 도태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며 꽉 조여진 신발끈처럼 삶의 틈을 찾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인문학 강연에서 나이 들면서 점점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이유에 대하여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반복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초행길에서 목적지를 향해 갈 때는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리는 것처럼 느끼지만 다시 돌아올 때는 길이 짧아진 것처럼 아주 빨리 도착하는 느낌이 듭니다.

이렇듯 우리가 경험한 일들은 뇌에서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새로운 경험은 많은 저항을 받게 되어 인지하는 시간이 길게 느껴진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고유번호는 변하지 않지만 조금은 넉넉하게 여유를 가지고, 가까운 길보다 돌아가는 길에서 삶의 지혜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글=박동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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