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덕의 역사기행]광개토태왕릉비 ‘辛卯年’ 기사의 해석
[배종덕의 역사기행]광개토태왕릉비 ‘辛卯年’ 기사의 해석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4.26 22: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광개토태왕릉비’는 고구려 19대 광개토태왕의 업적을 기리고자 그의 아들 장수왕이 CE 414년 고구려의 옛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에 세운 거대한 비석이다. 1883년, 일본군 참모부의 밀정 사카와 중위가 만주 지역을 정탐하기 위해 집안(集安)이라는 시골에 잠입했다가 ‘왜(倭)’라는 글자가 눈에 띄어 탁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곳은 만주족이 청(靑)나라를 세우면서 그들 민족의 발상지라 하여, 오랫동안 세인들의 출입을 금지했던 지역이었다.

사카와 중위가 가져간 탁본의 해독작업은 일본 육군 참모본부에서 비밀리에 진행했고, 1888년 아세아협회의 기관지 <회여록(會餘錄)>에 ‘고구려고비고(高句麗古碑考)’라는 제목으로 게재되었다. 그 후 7년이 지나 1905년 <황성신문>을 통해서 우리나라에도 알려졌다.

일본 학계는 비문의 ‘신묘년(辛卯年)’ 조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왜(倭)가 백제, 신라를 공격하여 신민으로 삼았다”는 글이 비문에 나와 있다고 해석했다. 이후 이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논문들이 마구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대부분이 광개토태왕릉비의 「신묘년기사(辛卯年記事)」를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4세기 후반에 현해탄을 건너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벌했다는 전설적 내용과 관련지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비문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구절은, 「… 百殘新羅舊是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新羅以爲臣民 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伐殘國民」이다. 이 비문은 “백잔(百殘)과 신라(新羅)는 예부터 속민(屬民)이어서 계속 조공(朝貢)을 보내왔다. 왜(倭)가 신묘년(辛卯年)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 신라를 깨부수어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6년 병신(丙申, CE 396)년에 광개토태왕이 직접 수군(水軍)을 이끌고 패잔 국민들을 토벌(討伐)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에 任那(임나)를 넣어 “왜(倭)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과 임나, 신라를 깨부수고 (왜의)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했다. 우리나라의 어떤 역사책에도 그런 기록은 없다. 이들은 줄곧 ‘임나(任那)’를 한반도 남부의 ‘가야(伽耶)’ 또는 ‘가라(加羅)’라고 주장했다. ‘백잔(百殘)’은 고구려가 백제를 낮추어 불렀던 이름이라고 했다.

‘속민(屬民)’은 ‘형제 국가’를, ‘신민(臣民)’은 ‘신하 국가’를 뜻한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형제 국가인 것은 맞지만, 고구려에 조공을 보낸 적은 없다. 더구나 백제, 신라, 가야 어느 나라도 왜의 신하 국가가 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4세기는 ‘일본(日本)’이라는 국명이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던 시기였다.

이 비문 속의 ‘백잔’과 ‘신라’는 일본 규슈에 있던 ‘백제의 분국’과 ‘신라의 분국’이었다. 백잔과 신라는 한반도 남쪽 사람들이 규슈로 건너가서 세운 작은 나라들이었고, ‘왜(倭)’는 기나이(畿內=倭의 수도 인근 지역)에 있던 야마토(大和, 倭) 조정이었다. ‘바다를 건넜다’는 것은 현해탄을 건넌 것이 아니고, 규슈에 있던 백제와 신라의 분국을 치기 위해 일본 열도의 내해인 세도나이카이(瀨戶內海)를 건넜다고 보는 것이 맞다.

세도나이카이는 일본 열도의 본섬과 시코쿠(四?)섬 사이의 긴 내해(內海)로 호수같이 조용한 바다다. 혼슈(본섬)의 ‘나라’나 ‘교토’에서 규슈로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바다를 건너와야 한다.

배종덕 역사칼럼니스트


정치
사회
경제
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