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자걸음 진동 춤’의 일벌 ‘봉매(蜂媒)’
‘팔자걸음 진동 춤’의 일벌 ‘봉매(蜂媒)’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4.19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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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보(冶父) 선사는 봄이 다가옴을 이렇게 표현했다. “기러기는 북쪽으로 날아갈 것을 생각하고, 제비는 옛 둥지로 돌아갈 것을 기억한다(?思飛塞北 燕憶舊巢歸).”. 현재 봄기운이 한창이다. 이미 기러기는 갔고, 제비는 옛집 태화강에서 날고 있다.

요즘 산과 들은 그토록 호화롭고 사치스럽던 꽃물결도 끝물이다. 특히 벚꽃이 그렇다. ‘붉은 꽃이 열흘을 못 간다(花無十日紅)’는 속담이 생각나서인지 상춘객들은 모두 이를 놓칠세라 마음껏 즐겼다.

수년 전 ‘능수만첩백도화’와 ‘능수만첩홍도화’ 작은 묘목 두 그루를 처음으로 화분에 심었다. 수년이 지나자 크기 탓인지 도화(桃花, 복사꽃)를 더는 포용하기가 어려웠다. 성장 과정에서 새싹 줄기에 옹기종기 모인 진딧물 떼가 엉덩이를 꼼지락거리며 수액을 한껏 빨아먹었고, 며칠이라도 돌보지 않으면 시들어서 안쓰러웠다. 이 궁리 저 궁리 끝에 2년 전 좁은 화단으로 옮겨 심었다. 한 해가 지나자 화분에 있을 때보다 확연히 다른 푸르름으로 생기가 넘쳤다.

도화는 올해를 기다렸다는 듯 꽃송이를 가지마다 탐스럽게 달았다. 하지만 뭇 꽃이 피어나는 만화방창(萬化方暢) 봄에도 걱정이 없다면 어찌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일이라 하겠는가. 도화는 활짝 피어 송이마다 얼굴을 내민다. 갓 씹은 멍게 향 같은 상긋한 내음도 풍긴다. 함제미인(含?美人, 눈매 고운 미인)의 눈길로 살랑 바람을 핑계 삼아 일벌을 기다린다. 하지만 기다리는 일벌보다 오히려 나를 다가서게 한다.

곁에서 족히 한 시간은 서성거렸을까. 하지만, 일벌은커녕 나비조차 찾지 않는다. ‘매봉(媒蜂)’은 꽃이 피는 봄 한 철이 제일 바쁜 계절이다. 꽃가루받이라는 중요한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매봉은 ‘벌’을 일컫는 또 다른 말이다. 벌의 꽃가루받이 역할 ‘중매(仲媒)’를 곰곰이 생각해 붙여 본 이름이다.

일벌과 꿀벌은 처음부터 태어난 목적이 다르다. ‘일벌’을 꿀벌로 아는 것은 꿀만 욕심내는 벌로 잘못 비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이 굳어지면 제 이익만 꾀하는 부정적 곤충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벌은 결코 꿀만 탐하는 곤충이 아니다. 해가 뜨고 질 때까지 꽃가루받이 소임에 충실하다 보니 그 대가로 꿀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일벌의 하루 움직임이나 자취는 독특하다. 화원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면 반드시 동료에게 팔자 모양으로 돌다가 부르르 떨며 날갯짓을 한다. 이러한 행동은 일벌 사이의 독창적 몸짓 신호의 하나다. 이러한 행동은 밀원(蜜源)의 거리와 꿀의 양 등을 알려주는 그들만의 독특한 소통 방식이다. 이를 ‘팔자걸음 진동 춤’으로 부르기로 했다.

일벌의 팔자 날갯짓 진동 춤은 꿀벌에 비유되는 사람의 거만한 팔자걸음과는 뚜렷이 다르다. 일벌은 수분(受粉·꽃가루받이)의 봉매(蜂媒) 역할을 책임진다.

벌은 군집 생활을 한다. ‘벌떼’라는 표현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올해 일벌의 마릿수가 뉴스거리가 될 만큼 줄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비가 꽃을 찾는다는 ‘접수화(蝶隨花)’는 옛말이 된 것일까. 이제 꽃이 일벌을 찾아야 할 형편이다.

어제는 해가 중천에 걸렸을 때쯤 불현듯 봉매 두 마리가 관찰됐다. 양팔에 꽃가루 토시를 낀 모양이 신기했다. 반가운 나머지 한참을 지켜봤다. 둘은 꽃송이에 매달려 꽃술에 머리를 처박고, 암술과 수술을 토닥거리며 앵∼앵∼하면서 부지런히 중매하고 있었다.

문득 현대가(現代家) 정몽구 회장의 좌우명 ‘일근천하무난사(日勤天下無難事=하루하루 부지런하면 천하에 어려운 것이 없다)’가 겹쳐졌다. 요컨대, 꿀벌이 자리(自利)를 앞세운 이름이라면, 일벌은 공(公)과 의(義)를 우선시하는 이름인 셈이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조류생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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