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고 싶은 사람
스며들고 싶은 사람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3.06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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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가 없는 나에게 꼭 친언니같이 대해 주시는 분이 있다. 팔십 중반을 바라보는 연세임에도 불구하고 시를 마음에 품고, 달과 별 그리고 구름을 좋아하는 소녀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베푸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실천하시는 분이다.

친정엄마보다 일곱 살이나 더 많은 분을 언니라고 부르는 게 조금 어색했지만, 처음 만났을 때 “선생님” 하고 불렀더니 “나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들을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언니’라고 불러주면 좋겠어요.”라고 하셨다. 그 말씀만으로도 겸손의 향기를 느낄 수 있었고, 그때부터 나의 언니가 되어주셨다.

언니는 부군을 대하시는 모습으로도 보는 이들 마음의 온도를 높여주는 것 같다. 말씀 한마디에도 존중하고 깊이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그런 당신을 보면 “남편의 인상은 아내가 만들고, 아내의 인상은 남편이 만든다.”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두 분의 부부생활은 내가 바라는 우리 부부의 황혼의 모습이기도 하다. 팔순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부군을 위해 요리하시는 모습에 경의를 표하고 싶을 때가 많다.

언젠가 한 번은 언니의 칠순 때 며느리가 써준 편지를 본 적이 있다. “제가 어머님 연세만 할 때쯤이면 저도 당신을 많이 닮아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자부에게도 이렇게 존경받는 분을 가까이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언니는 ‘재활용의 여왕’이라고도 소개하고 싶다. 그 이유는 다 쓴 고무장갑 하나도 쉽게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부위별로 잘라서 머리를 묶는 데 사용하기도 하고, 식재료를 밀봉하는 데 쓰기도 한다. 그뿐인가. 환경보호를 위해 일회용품은 되도록 적게 쓰고, 한 번 쓴 일회용품은 당신의 지혜로 다시 쓰이게 된다. 때로는 알면서도 귀찮아서 그냥 버렸던 나를 반성하게 한다.

언니는 돈을 무척 아껴 쓰면서도 기부 천사이기도 하다. 평소에도 불우이웃 돕기에 앞장서는가 하면, 몇 해 전에 지인이 유방암 수술을 하게 되었을 때는 수술비에 보태 쓰라고 수백만 원을 보내 주었다는 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들었다.

언니는 언제부터인가 해마다 자녀들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를 써놓는다고 하신다. 이를테면 유언인 셈이다. 그 내용의 한 가지는 “내 죽음을 애도하며 오는 지인들에게 조의금은 받지 말 것이며, 따뜻한 밥 한 그릇 대접하고, 멀리서 오는 분들에게는 교통비를 꼭 챙겨 드려라.”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사람들에게 베풀고 싶어 하는 당신을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가까이에서 언니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나의 지난날들을 반추해본다. 가족들이 나의 뜻에 반대되는 말이나 행동을 할 때면,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고 이해하려는 마음보다, 섭섭하고 속상한 마음이 앞서서 쉽게 화를 내면서 짜증도 내었던 적이 있었다. 요즘은 사춘기보다 더 무섭다는 갱년기를 내세우며 무조건 나를 이해해주길 바란 적도 많았다.

만약 상대가 타인이었다면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말도 채에 걸러서 조심스럽게 하려고 노력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가족에겐 편하다는 이유로 그렇게 하지 못 했던 나 자신이 후회스럽다.

나를 결정하는 건 “내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 내가 읽은 책, 내가 가 본 곳”이라고 했던가. 나도 누군가에게 베풀어가며 함초롬히 단풍 들고 싶다. 그리고 언니 곁에 오래 머물면서 당신의 마음의 향기가 내게도 스며들 수 있기를 바라본다.

천애란 사단법인 색동회 울산지부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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