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因緣)을 넘은 숙명(宿命)으로!
인연(因緣)을 넘은 숙명(宿命)으로!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2.02.02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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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자기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기와 장면, 공간이 있다. 내게는 울산이 그렇다. 서울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부터 대학원까지 줄곧 다니고, 첫 직장으로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화학연구원을 들어갔다. 그때는 그렇게 인생길이 쭉 정해진 줄 알았다. 그런데 대전에서의 20여년 생활이 어느 정도 몸에 익숙해질 무렵, 돌연 내 눈앞에 울산이 나타났다. 2006년의 일이다. 정말 꿈에도 생각지도 못한 곳이었다. 그동안은 서울과 대전만이 나의 생활 터전이었기에.

내게 울산은 한 시절이면서 애틋한 장소이고, 공식적인 기록이면서 개별적인 주어이기도 하다. 어디에 반듯하게 내세울 만한 벼슬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첫사랑이나 옛 추억과 이어진 사연도 없다. 하지만 이젠 울산을 제외하고는 내 삶을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됐다. 역설적으로 그것은 내가 울산과 아무 인연이 없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최근엔 숲길에서 기적이라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연을 만났다. 이렇듯 인연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 꼭 쥐어야 내 것이 되는 인연은 진짜 내 인연이 아니다. 우리는 좋은 사람으로 만나 착한 사람으로 헤어지고, 그리운 사람으로 남아야 한다.

40대 후반에는 인생에 대한 회의와 사람에 대한 배신감으로 힘든 때가 있었다. ‘우연히 만나 관심을 가지면 인연이 되고, 공을 들이면 필연이 된다’는 말을 너무 믿은 탓일까. 희미한 안개 속으로 그때 기적처럼 울산이 다가왔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일에 도전해보자는 오기가 발동했다. “편안한 대전을 왜 떠나느냐?”고 주위의 만류가 심했지만,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고 결심했다. 그리곤 홀로 울산으로 내려왔다. 벌써 16년이 흘렀다. 3명으로 출발한 한국화학연구원 울산 조직은 180여명으로 늘어났다. 세계적인 성과도 속속 나오고 있다. 울산은 인연을 넘은 숙명(宿命)임에 틀림없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측정 가능한 것과 측정 불가능한 것으로 나뉜다. 측정 가능한 것에는 몇 킬로그램, 몇 미터, 몇 리터처럼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측정 단위가 정해진다. 반면에 측정 불가능한 것에는 측정 단위가 매겨지지 않는다. 감정과 관련된 객관적인 기준도 그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측정이 불가능한 것들을 굳이 측정해 정확한 측정값을 알고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곤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져지지도 않고, 귀로 들을 수도 없는 것들의 무게나 깊이, 혹은 넓이나 밀도 등이 궁금해 얼마나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던가?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의 무게는 얼마나 되는지 자꾸 재보고 싶고, 누군가 용서를 구하면 그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조금 더 따지고 싶어한다. 상처를 주는 타인의 말 속에 과연 나에 대한 미움의 밀도는 얼마나 촘촘한지, 희망은 지금의 나로부터 실제로 얼마나 먼 거리에 있는지도 계산해 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시도들은 대부분 실패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눈물의 무게를 측정할 수는 있어도, 눈물에 담긴 슬픔의 무게는 누가 어떻게 어떤 기준으로 알아낼 수 있을까?

자녀의 신장이 몇 센티미터 늘었는지, 아파트 거실의 면적은 얼마인지, 자동차 연비는 또 몇 킬로미터인지는 살아가면서 정확하게 잴수록 도움이 된다. 하지만 그러한 측정 가능한 계산은 우리에게 안전함을 제공할 뿐, 성숙함을 주진 못한다.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것은 오히려 측정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불안한 ‘감각’이다. 사랑, 미움, 용서는 그 크기와 무게가 아니라, 단 한 방울의 존재감만으로 우리를 송두리째 흔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흔들림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참모습을 조금씩 발견할 수 있다.

난 ‘울산명예시민’의 자긍심이 크다. 울산에 대한 사랑도 남다르다고 감히 자신한다. 그러나 이 사랑의 무게도 측정할 수 없다. 이젠 측정이 불가능한 것에 대해 예민한 감각으로, 흔들리면서도 더욱 성숙해지고자 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김장독이 터질 정도의 추위로 봄을 경계하는 ‘시샘달’이 시작해서 그런가. 나이가 들수록 계산만 빨라지고, 감각은 둔해질까 봐 겁난다.

이동구 본보 독자위원장, RUPI사업단장, 한국화학연구원 전문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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