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두기’를 잊고 있었다
‘깍두기’를 잊고 있었다
  • 울산제일일보
  • 승인 2021.12.02 2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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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친구 민철이는 소아마비로 오른손은 안으로 굽었고, 왼발은 땅에 질질 끌고 다녔다. 민철이는 6·25 참전 상이용사 ‘김씨 아저씨’의 아들이었다. 전쟁 상처로 오른손에 갈고리를 한 김씨는 동네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 김씨는 민철이가 울면서 집에 돌아오면 희번덕거리는 눈빛으로 갈고리를 앞세워 민철이를 울린 아이의 집을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

작달막하고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했던 민철이 어머니는 생활력 없는 남편과 거동이 불편한 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극성스러운 여장부였다. 동네 품앗이는 도맡아 했고, 집 뒤 텃밭에서 가꾼 채소를 장에 내다 팔았다. 닭과 염소와 소를 사서 살림을 늘려 가더니 동네 구석진 곳의 집을 팔아 마을회관이 있는 동네 중앙에다 번듯한 집채를 장만했다. 그녀의 억척스러움은 민철이를 위해서였다. 민철이가 따돌림을 당할까 봐 그 시절 선망의 대상이었던 ‘왕눈깔사탕’을 사주기도 했다.

부모의 과잉보호로 자란 민철이는 성격이 고약했다. 제 고집대로 안 되면 땅바닥을 뒹굴었다. 겨울에 팽이치기할 때 제 팽이가 죽으면 다른 아이의 팽이를 발로 찼고, 여자아이들의 고무줄 끊기도 예사였다. 그래도 민철이가 친구들과 어울릴 수 있었던 것은 김씨 아저씨의 무서움과 민철이 어머니가 준 사탕의 달콤함 때문이었다.

민철이는 ‘깍두기’였다. 민철이가 몸이 불편한데도 친구들과 같이 놀 수 있었던 것은 ‘깍두기’란 놀이 덕분이었다. 깍두기는 놀이 규칙에 구애받지 않고 ‘죽여도 죽일 수 없는’ 무소불위의 권능을 부릴 수 있었다. 누군가는 깍두기 불평도 했지만, 놀이는 언제나 즐거웠다. 우리 또래끼리는 민철이가 깍두기였지만, 내가 동네 형들과 놀 때는 나도 깍두기가 됐다. 놀이에 안 끼워 주려는 형들에게 “나 깍두기 하면 되잖아” 하면 두말없이 “그래”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어린 시절의 놀이 추억은 시골에서 도시로 전학을 가면서 서서히 잊혀졌다.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으로 기억된다. 시골에 내려가 친구들에게 민철이 안부를 물었더니, 몇 년 전 여름 장마철에 냇가에서 놀다가 불어난 물에 휩쓸려 죽었다고 했다. 그 후 민철이 부모님은 가산을 정리해 어느 날 밤 흔적도 없이 동네를 떠났다고 한다.

민철이에 대한 기억이 소환된 것은 ‘오징어 게임’ 때문이다. 6화에서 121번 한미녀(김주령 분)는 죽음이 암시됐지만 7화에서 다시 나타나 “가면 쓴 놈들이 나보고 깍두기라고 했다”고 말한다. 한미녀가 깍두기라고 말한 순간 소름이 돋았다. 왜, 내가 깍두기를 잊고 있었지?

깍두기를 잊고 있었던 건 함께 하는 놀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요즘 세태에선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 학교생활이 끝나 학원으로 또 공부하러 가면 친구들과 부대끼며 놀 시간이 없다. 잠깐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은 컴퓨터와 스마트폰에 빠져 있기 일쑤다. 사이버 게임은 개인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깍두기 문화’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그렇게 ‘깍두기’는 잊혀지고 말았다.

깍두기 문화는 어릴 때부터 배려와 양보, 사회성을 길러주며 자연스레 우리의 삶에 녹아든 소중한 정신자산이다. 깍두기 문화는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놀 때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스스로 배우게 된다. 아이들이 ‘깍두기 문화’를 모르고 성장하는 것은 어른들의 잘못이다.

아이들이 깍두기 문화를 배울 수 있도록 신나는 놀이터를 만들어 줘야 한다. 또 아이들이 놀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게 필요하다. ‘공부 또 공부’에 매몰된 아이들에게 ‘깍두기 문화’를 되돌려 줄 때다. 적어도 어릴 때만큼은 아이들이 정말 신나게 놀 수 있는 나라를 생각해본다.

정인준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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